"여 교수 채용, 법대로 합시다"

서울대 법대생들 '여교수 채용해달라' 학교에 공개요청

10월 18일 오후 서울대 법대 100주년 기념관. 안경환(安京煥) 서울대 법대 학장과 법대생들이 만난 간담회 자리에서 박정은 법대 학생회장은 법대생 387명의 이름이 적힌 서명서를 안 학장에게 제출했다.

‘우리는 여 교수를 원한다’는 성명서와 함께. 박정은씨는 안 학장에게 “법대의 완고한 남성 위주의 전통을 깨야할 때가 아니냐”며 여 교수 채용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서울대 법대의 깨지지 않은 하나의 전통이 있다면, 다름아닌 ‘여 교수가 한명도 없다’는 점이다. 개교이래 단 한명의 여 교수도 채용하지 않은 서울대 법대 강단의 완고한 ‘금녀(禁女)’ 전통을 깨기 위해 학생들이 발벗고 나서고 있다. 여 교수 채용을 위한 다각도의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개교 이래 여교수 전무

이날 ‘신규 임용시 여 교수를 포함시켜달라’는 요지의 학생서명서를 법대측에 제출한 법대 학생회는 여성부, 민변 여성위원회 등 여성단체에게도 학교로 성명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박정은 학생회장은 “개교 이래 단 한명의 여 교수가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여성차별이다”며 “교수님들 대부분이 여 교수를 뽑을 때가 됐다는 점에 공감하지만 일부 교수들의 반대로 여전히 여성을 배척하는 풍토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80년대만해도 소수에 불과했던 법대 여학생은 90년대를 넘어서며 대폭 증가해왔다. 80년대초 3% 수준에 머물던 법대 학부의 여학생 비율은 2002년 1학기 현재 24.3%(356명)에 이른다. 박사과정도 마찬가지로 80년대초에는 한두명 수준에 불과했지만 꾸준히 증가해 2001학년도 1학기 박사과정 등록생 75명중 19명(25%)이 여학생이다. 여성 법학자 인력이 꾸준히 양성돼왔던 셈이지만 교수 채용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학생들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법대 교수들은 “이제 여교수를 채용할 때가 됐다”며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다. 한인섭 법대 부학장은 “교수들도 이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여 수 채용을 위해 노력중”이라고 말했다.

안경환 학장도 “보수적인 법대 전통에 여성 교수를 채용하는 것은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안 학장은 그러나 “학생들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능력을 갖춘 여성들은 대부분 법조계로 빠져나가 사실상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뽑지 않은 것이지 특별히 여성을 배타했던 것은 아니다”며 “우리도 뽑고는 싶지만 능력을 갖춘 지원자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특별히 여성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적임자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법대측의 해명에 대해 학생들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은영 한국외대 교수 건이 꼽힌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등 전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 교수는 국내 민법분야 해석학의 체계를 확립한 곽윤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뒤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주목받는 교수다.

이 교수는 그러나 90년대 중반 서울대 교수직을 지원했지만 임용되지 못했다. 당시 법대 내에서는 이교수의 채용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교수 임용 심사 막판에 몇몇 교수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채용절차가 진행중인 헌법분야 교수채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올 여름 퇴임한 최대권 교수 후임 교수자리를 놓고 임용 심사가 진행중인 가운데 탁월한 실력을 갖춘 여성 지원자도 교수직 물망에 올라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대의 한 대학원생은 “이 지원자의 경우 최고의 실력을 가졌음은 이미 대학원생들 사이에선 공인됐지만 여성이라는 것과 학부가 타대 출신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여교수 채용 꺼리는 풍토 여전

법대 교수 상당수가 여 교수 채용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여전히 여 교수 채용을 꺼리는 풍토가 남아있다는 것이 법대 주변의 시각이다. 한 대학원생은 “교수채용과정에서 해당 전공분야의 한 두 교수가 강하게 반대하면 임용이 어렵기 때문에 여 교수 채용에서도 난항을 겪는 것으로 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법대 학생들이 여 교수 채용과 함께 요구하고 있는 것은 법여성학 강의 개설이다. 법여성학은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으로 90년대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학문. 박정은 학생회장은 “균형 있고 완전한 법해석을 위해서는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도 법해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법여성학 전공자들이 대부분 여성들이기 때문에 법 여성학이 신설되면 자연스럽게 여 교수 채용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법대 교수 정원을 늘려야 하는 문제 등이 놓여 있어 이마저도 힘겨운 실정이다.

법대 학생들은 그러나 상당수 법대 교수들이 학생들의 뜻에 동의하는 만큼 학생들이 여론을 조성하고 분위기를 이끈다면, 일부 교수들의 여성 배척 풍토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며 여 교수 채용에 낙관적 기대를 걸었다.


서울대 교수 1,496명중 여교수 114명에 불과

2002년도 서울대 국감자료에 따르면 서울대 전체 전임교원 1,496명중 여성은 114명으로 7.6%에 불과하다. 여 교수가 없는 단대는 법대 뿐 아니라 경영대, 수의대 등 3개 단과대에 이른다. 학과별로 따지면 국어국문학과, 외교학과 등 46개 학과에 달한다.

농업생명대도 여 교수가 전무하다가 지난달 윤혜정 교수가 생물자원공학부 전임강사로 임명되면서 금녀의 벽이 깨졌다. 공대에도 여 교수는 올 1월 임용된 전화숙 전기컴퓨터 공학부 교수 단 1명 밖에 없다. 전 교수는 98년 정년퇴임한 박순자 명예교수 이후 4년 동안 끊겼던 공대 여성교수의 맥을 이었다.

여학생 비율이 높은 서울대 미대의 경우도 29명의 교수중 여 교수는 3명에 불과하다. 이밖에 여학생 비율이 절반인 의대(3.1%) 치대(3.3%) 약대(5.1%)도 여교수 비율은 극히 낮다.

서울대 여 교수 비율은 사립대(16%)나 국공립대 평균(8.8%)보다도 낮다. 보수적인 학문풍토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울대 여교수회는 지난해 여성교수비율을 5년내 10%까지 올리는 ‘여 교수 임용할당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최근 서울대 학보사인 대학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동등한 능력 및 자격소지가 가운데 여성지원자를 우선 임용하는 단대에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고려해볼만 하다”며 여 교수 채용을 권장하겠다는 뜻을 밝혀 여 교수 채용에 돌파구가 마련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송용창 기자

입력시간 2002/10/29 17:43


송용창 hermeet@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