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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巨匠] 민음사 박맹호 사장

[우리 시대의 巨匠] 민음사 박맹호 사장

"출판은 재능있는 영혼을 키우는 농사"

“올해 우리 나이로 칠십이죠. 고래희(古來稀)라 불렀는데 요즘은 그 나이가 청춘이라더군요.” 얼마 전 상으로 받은 기념 조형물 옆에서 민음사 박맹호 사장(69)이 백발을 흩날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와중에 언뜻 언뜻 지나치는 안광에는 젊은 시절의 예리함이 여전히 살아 있다. 젊은이처럼, 두 발은 여전히 바쁘다.

10월 16일 경기 파주의 출판문화 정보산업 단지에 들러 민음사 사옥 건축 기공식의 테이프를 끊었다. 1만2,000평 부지에 2,000평 크기의 3층 건물을 짓고 현재 서울 강남구 신사동 민음사의 창고와 유통 업무 기능을 따로 떼내 이전할 계획이다. 2003년 5월께 준공된다.

“편집과 생산 시설 등 출판의 하드웨어가 종합 단지의 형태로 한 곳에 집적되는 것은 세계 최초예요. 외국서 심심찮게 견학들 오죠.” 세계 최대의 서점가인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편집, 유통, 기획, 생산 시설 등이 모두 집중될 이곳은 머잖아 인천공항의 허브와 연계되면 세계 최초, 최대의 출판 콤플렉스가 될 전망이죠.”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이사로서 하는 말이다.

이틀전인 14일 서울대 문화관에서 열렸던 제 56주년 개교기념식에서는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돼 기념 조형물 등을 받았다. ‘오늘의 시인 총서’와 ‘민음의 시’ 등 시선집,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에 초점을 맞춘 ‘이데아 총서’ 등 인문ㆍ예술 서적, 인문ㆍ사회ㆍ자연 과학을 망라한 ‘대우 학술 총서’ 등 굵직굵직한 시리즈물은 문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 거점으로서의 민음사의 위상을 굳혔다. 이른바 ‘시집 판형’ 역시 민음사의 작품이다.

1974년 발행된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는 당시로서는 못 보던 판형이었다. 시집이란 독특한 출판물이 형태적 면에서 ‘시적 자유’를 구가하게 된 단초였다. 77년 ‘오늘의 작가상’을, 81년 ‘김수영 문학상’이란 틀을 만들더니 머잖아 김광규, 황지우, 이성복, 장정일 등 재기발랄한 언어가 자랄 터전으로 성장했다. 특히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강석경 등 ‘오늘의 작가상’ 데뷔 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그는 “크게 돈 버는 것도 아닌데, 기대ㆍ호기심ㆍ불안 속의 나날을 반복해 온 걸 보면 출판은 분명 마력적 유혹”이라고 단언한다. 이름을 얻지 못한 신인 작가들이 자신의 출판물을 통해 시장으로 나가면, 시장은 바로 바로 반응해 온다. 그 강렬한 기쁨의 힘으로 버텨 온 세월이다. “재능 있는 영혼을 만나고, 그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농작물을 키우고 거두는 과정과 흡사하죠.”

그는 당대 일류 작가들과 일반 대중 사이의 통풍구다. 읽어주는 이 없는 저작은 공허하고, 방향판 없는 독서는 맹목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33세이던 1966년 5월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그는 한번도 그 예리한 접선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발행한 3,000여종의 단행본은 한국 인문학의 숨통을 터주었다.

그에게는 경영인보다는 당대 일류의 지성들과 부대껴온 문사들의 흔적이 더욱 짙다. “김수영도, 김현도 갔죠” 라는 말하는 그의 얼굴에 세월의 그림자가 진다. 특히 서울대 불문과 과 후배였던 김현 시인은 세상을 뜰 때까지 그의 긴밀한 동반자였다.

광화문에서 전화상을 하던 처남의 옥탑방 사무실을 빌려 출발했던 그를 지탱해준 힘은 문청(문학 청년)의 방황과 출판인의 낭만이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인들의 삶에 속살을 채워갔다. 당시 대중적으로는 무명 화가에 가까웠던 화가 이중섭이 오늘의 모습을 얻게 된 데에는 그의 안목에다 발로 취재한 고은 시인의 글힘이 결정적이었다. “요즘 회자되는 이중섭의 신화는 모두 고은이 당시에 만들어 놓은 거예요. 조카, 일본인 처 등 관련인들은 모두 다 취재했죠.”

당대의 흐름을 읽는 예리함 역시 필요하다. 국내에 판타지 붐의 초창기, 인터넷을 주름잡고 있던 작가 이영도가 12권 분량의 황당한 이야기 원고 뭉치를 들고 마산서 올라 민음사를 찾았다. 현실에는 없는 시공의 이야기 ‘드래곤 라자’는 그렇게 해서 일반 대중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대중문화의 새 시대를 연다는 포부로 출발한 계열사인 ‘황금가지’ 편집진들은 성공을 장담했지만 그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땐 출판이란 게 뭔지 모르겠더라구.” 출판인으로서의 경륜과 상식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일급 작가들의 노작만을 싣는 ‘오늘의 작가상’ 수록 도서가 잘 나가봤자 5만~6만여권 선인데, 마산 토박이 의 무명 청년이 쓴 판타지 12권이 한꺼번에 히트 치는 양상을 보고 그는 달라진 시대를 절감했다.

1996년 설립한 출판사 ‘황금가지’는 급변하는 대중 문화의 양상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마당이다. 97년에 세운 ‘사이언스 북스’는 첨단의 속도로 일반에게 멀어져 가는 21세기 과학의 실상을 담아 내고 있다. 또 94년에는 아동 문학전문 출판사 ‘비룡소’를 설립, 사이버 시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외국의 동화들을 소개해 오고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드는 이문열이 원고 뭉치를 들고 대구에서 올라왔을 때도 그가 있었다. “보통 달변이기 일쑤인 문청의 통념을 깬, 과묵파였어요.” 그러나 문명을 얻어 매스컴의 단련을 받고 난 이후에는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느냐 싶을 정도다. 지난 9월 영국 캠브리지대 초빙 연구원으로 가 있는 이문열은 요즘도 박 사장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 안부와 국내 동향을 물어 온다.


출판은 영원한 벤처, 실패해도 즐거워

(종이)책은 살아 남을까? 그에 의하면 출판이란 영원한 벤처 사업이다. 그는 “실패 해도 즐거운 실패”라고 단언한다. 창조적 지식을 만드는 벤처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인문 분야 출판의 속성을 한 줄로 압축했다.

“인문학이나 소설책 분야로는 ‘모험’을 걸 수 없어요. 대박이 터지더라도 이익을 남기지는 못하니까요.” 화끈한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인문학 서적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크게 봐서 이것은 출판업의 운명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1999년 프랑크푸르트 도서 박람회의 테마는 ‘(종이) 책은 영원하다’였다. 그러나 지금 책은 사이버(e-북)에 침윤돼 가고 있는 듯 비치기 십상이다. 출판, 보다 정확히 종이책은 어디까지 갈까. 이 대목에 이르러 그는 보수주의자로 돌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저에는 기존의 책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그의 경험치가 한몫 단단히 한다.

그가 출판업에 뛰어든 바로 그 무렵, TV가 등장했다. ‘인쇄는 이제 망했다’는 아우성이 빗발쳤으나 출판 시장은 확대를 거듭, 현재는 당시 시장 규모의 100배다. ‘인간 성숙과 지식의 축적은 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믿음은 더욱 강해간다.

민음사 최대의 히트작으로 대접 받는 이문열의 ‘삼국지’가 좋은 예다. 1989년 빛을 본 이래 모두 1,300만부 판매 실적을 올렸다. 한국 출판 사상 단행본으로서는 성경과 교과서의 뒤를 바로 잇는 매출 실적이다. 한질 10권 짜리가 매년 50만~100만부는 나가는 추세다.

그는 ‘종이 책으로 익힌 것만이 진정한 지식으로 남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책은 정보를 담은 예술품”이라는 그의 확신은 책의 외양이 더 화려해지고 정교해지고 있는 세계적 추세가 뒷받침한다. 우리 독서계는 하드 커버를 거치지 못 했다. 그는 “운동권 세대의 페이퍼 백 선호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독특한 지적이다.


디지털시대를 호령하는 아날로그인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의 책은 곧 바로 ‘대량 소비 사회’로 들어가고 말았다. 전경들의 불심 검문에 붙잡혀 느닷없이 가방 속의 소지품을 일일이 게워내야 했던 386 세대에게 책 자체에 대한 외경심은 사치에 가까왔다. 우리가 독서에 인색한 데에는 지난 시절, 책에 퍼부어진 모멸도 한몫 작용한다.

“일본이 독서 강국으로 큰 데에는 책을 ‘체감’한다는 즐거움을 공유했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겐 그러나 책이란 읽고 버리는 물건을 벗어나지 못 했죠.” 자기 주장을 펼 기회도 갖지 못한 하드 커버가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은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몫이라는 것이다.

민음사는 1994년 국내 출판사 중 처음으로 저작권 전담 부서를 상설 기구로 만들었다. 한해 전 한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저작권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마련한 기구다. 이로써 ‘드래곤 라자’, ‘DMZ’ 등 민음사에서 출판돼 해외로 소개된 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각각 6만 달러, 3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았다.

“민음사의 요체는 질 높은 작가들과 맺고 있는 신뢰입니다. 상업적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면 벌써 망했을 테지만, 우리의 경우는 아예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죠.” 디지털 시대를 호령하는 아날로그인의 뚝심. 그 극점에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10/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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