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판타지에 홀린다

영화·애니메이션 ·출판 등 동양적 상상력으로 환상의 '대박' 행진

영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는 광대무변한 상상력으로 구축된 가상의 세계가 영원한 예술의 보고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그러나 목 없는 기사, 머리에 뿔이 난 악마, 사람을 태우고 날아다니는 빗자루 등 서구 문화의 관습에서 파생한 소재만이 상상력을 부추기는가.

일본의 토속 신앙에 바탕을 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은 2002년 베를린 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그 여파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2년 6~8월 국내에 개봉돼 200만 7,000여명을 동원, 할리우드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슈렉’의 238만명에 버금가는 ‘대박’을 터뜨렸다. 수입사인 대원 C&A는 이 영화 한편으로 매출액 65억(순수익 20억)원을 올렸다.

동국대 강사 김윤아씨는 ‘비평’ 9월 호 기고문을 통해 ‘인기의 최대 요인은 국내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판타지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일본의 토속 신앙과 신화작자 조셉 캠벨의 영웅 신화를 결합해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흥행에 고무된 대원 C&A는 토속성 짙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을 계속 수입할 계획이다. 12월께 그의 흥행 대작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올리고 2003년 1월에는 그의 대표작 ‘원령 공주’를 수입 개봉할 계획이다. ‘원령공주’는 일본 특유의 정령 신앙, 아이누족의 민담,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등이 어우러진 환상의 세계를 담고 있다.

영화 ‘여고괴담’에서 여고생들이 벌이는 주술 잔치인 ‘분신사마’ 놀이는 사이버 시대의 ‘생활속 동양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치열한 경쟁이 주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생기는 가위눌림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중국 기서 ‘요재지이’ 완간

동양적 상상력의 보고로 불리우는 중국의 기서 ‘요재지이(聊齋志異)’가 2002년 8월 완역 출판돼 독서계의 화제로 떠오르며 동양 판타지 붐의 정점을 장식하고 있다. 요재에서 지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의 이 기담집에는 모두 497개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요재란 책을 쓴 명(明)말청(淸)초의 문인 포송령(蒲松齡)의 서재를 뜻한다. 이 책은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 등과 함께 중국 8대 기서의 반열에 드는 고전이다.

책에 나오는 중국의 귀신들은 지상에 사는 인간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있다. 시샘하고, 어긋장을 놓고, 사랑도 하다, 결국 그들의 세계로 돌아 간다. 아내를 때려 죽인 남자가 지역 현령에게 불려가 귀와 고환을 자르는 형벌을 받았는데 그 사람은 알고 보니 저승에서 내리는 벌을 받고 죽어 있었다(‘이사감’).

아름다운 귀신 섭소천과 순진한 서생 영채신의 사랑을 그린 ‘섭소천(聶小倩)’은 왕조현과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천녀유혼’의 모티브였다. 칸 영화제 기술 대상을 받은 ‘협녀(俠女)’의 원래 텍스트 역시 이 책이다.

아리따운 처자를 도와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괴여서 화를 당하고 만다. 또 아버지의 죽음에 억울한 사연이 있다고 믿은 아들이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저승에 찾아 가 염라대왕의 대리가 되는 등 생과 사를 가르고 있던 완고한 벽이 해체된다.

갖가지 귀신들의 입을 빌어 포송령은 어둡고 혼란스런 시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투사하고 있다. 농민들의 빈곤상, 과거 제도 등 관리들의 부패, 봉건 사회의 폐쇄성이 가져온 비극 등의 문제를 뒤집어 생각하고 형상화해 낸 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 육조 시대에 완성된 지괴(志怪) 소설의 전통을 잇고 있다. 시간과 공간,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되는 도교적 환상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중국인들의 집단 무의식이다. 포송령은 매일 아침 차를 달여 가득 채운 물통과 담배 한 움큼을 준비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길에서 이야기들을 채집했다.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듣고 기록해 집으로 와서는 형식과 체계를 갖춰 문학 작품으로 각색했다.

6권의 책은 한밭대 중문과 김혜경 교수가 1991년 읽기 시작한 이래 10년에 걸쳐 번역해 낸 것이다. 김 교수는 수록 단편을 교과 과정에서 간간이 소개해 오다 교수와 학생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김 교수는 “원문의 화려한 문체는 언어 예술의 금자탑을 보여준다”며 “앞으로 ‘서유기’ 등 동양적 판타지의 매력이 압축돼 있는 중국 고전들을 새롭게 완간 번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이미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에서 상위권을 기록하는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각권 말미마다 주(註)를 둬 풍수와 인물 등에 관한 정보를 축략해 두는 등 학술적 접근이 대학가 요재지이 열풍에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홱? 완역판 출판에 때맞춰 9월에는 축약본인 ‘한권으로 읽는 요재지이’까지 출판됐다(자음과 모음 펴냄).


네티즌도 동양적 소재에 열광

동양 판타지의 모티브는 네티즌에게 직접적인 창작의 소재로 작용한다. 그 첫 작품은 여류 작가 유시진(32)의 ‘마니(摩尼)’. 1994~95년 격주간 순정만화 전문지 ‘윙크’의 도메인에서 높은 호응을 받으며 연재됐던 이 작품은 처용 설화가 상상의 발단이다. 주인공을 왕위 계승싸움을 피해 온 용왕족으로 설정했다. 마법, 마술 지팡이 등 서양의 소재들이 동양의 것들로 치환된다. ‘마니’란 여의주를 뜻하는 범어다.

처용의 아들 해루와 용왕족 소녀 마니의 사랑 이야기다. 하루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상대까지 저버리고 떠날 정도로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사람. 마니는 여타 판타지의 여주인공처럼 연약하고 청순한 공주가 아니다. 해루와 함께 힘든 통과의례 과정을 거쳐 가는 주인공, 즉 사랑을 담보로 육체와 정신의 성장을 이룬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순정 판타지라는 새 장르의 효시가 된 이 작품은 독자의 요청으로 2002년 9월 단행본으로 나왔다. 하드 커버 양장으로 제본돼 상하 두 권(권당 9,000원)으로 출판됐던 이 작품은 동양 판타지 만화의 길을 텄다.


내밀한 욕구 반영하는 판타지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는 중세인들이 미래에 대해 느꼈던 불안과 초조의 본질은 우리가 미래에 대해 갖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사이버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가상의 시나리오 또는 판타지 문학에 대한 신세대의 열광은 현재의 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들의 내밀한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 가치관과 도덕이 해체되면서 갈수록 뚜렷한 준거(準據) 틀을 찾기 힘들어진 현실에서 그들 나름의 탈출구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때로 이것이 훌륭한 상상력과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0/2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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