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강건너 불 아니다] '원 샷 원 킬' 미국이 떤다

공포의 살인게임 '저격테러', 알 카에다의 조직적 개입 가능성도

'원 샷 원 킬 (One shot one kill).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저격 공포가 워싱턴 DC 일대를 휩쓸고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범인은 사냥을 하듯 자신이 고른 '사냥감'에 한 발의 총알을 발사한 뒤 꼬리를 감추는 행각을 3주째 이어가고 있다. 벌써 9명을 숨지게 하고 2명에 중상을 입히 '사이코 스나이퍼(정신병자 저격수)' 는 10월19일 '주말의 평화'를 깨고 또 한명의 주민에게 총질을 해댔다.

경찰은 속수무책이다. 범인은 경찰의 철통 같은 그물망을 넘나드며 살인 게임을 즐기고 있지만 경찰은 범인의 윤곽은 커녕 단서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주말에 울린 총성

19일 오후 8시 46분(한국시간 오전9시46분) 워싱턴 DC에서 남쪽으로 14km 떨어진 버지니아주 애쉬랜드 지역의 판다로사 식당앞, 짧은 총성이 토요일 밤 하늘을 가르면서 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37세의 백인남자가 쓰러졌다.

14일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의 주택수리전문점 홈 디포 앞에서연방수사국(FBI) 요원 출신의 여성을 저격한 뒤 5일동안 잠적했던 범인이 다시 활동을 개시한 신호였다.

이 한발의 총성은 주말은 안전하다는 주민들의 믿음마저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지금까지 범인은 주말과 일요일에는 철저히 '작업'을 피했다. 초기 7건과 9일 등교길 중학생에 대한 총격을 빼면 범인음 금요일에 범행을 하고 이틀을 쉰 뒤 다시 월요일에 라이플을 당기는 일정한 패턴을 따랐다.

이날의 총격은 앞으로도 주말, 주중, 낮 밤을 가리지 않는 럭비공식 살인 저격 행각이 이어질 것을 예고하면서 주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샷 앤드 런(Shot and Run)

2일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총알 한발이 한 상점의 유리창을 관통한 이후 범인은 '소고 달아나는' 수법으로 경찰을 따돌리고 있다. 초기인 2일과 3일 범인은 몽고메리 카우티와 프린스 조지스카운티 등 인접지역의 비교적 좁은 반경내에서 짧은 시간차를 두고 쇼핑을 하거나 잔디를 깎는 주민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몰아치기식 범행 형태를 보였다.

이틀 사이에 지금까지 13건의 범행 중 절반 이상인 7건이 발생, 첫 총격을 제외하고 6명이 숨졌다.

하지만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체계를 갖추고 추적하면서부터 범인은 작전을 변경했다. 다음 범행까지 최소한 2, 3일의 간격을 두고 있다.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등 행동반경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19일 총격은 범행의 장소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범인은 최근 5차례의 범행에서 주요 고속도로와 간선도로에서 불과 몇 백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주유소나 쇼핑센터를 범행장소로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범인의 치밀한 계산이 엿보인다. 19일 범행은 95번 고속도로와 1번 국도에서 400m 떨어진 곳에서, 14일 사건의 장소은 50번 국도 바로 부근에서 자행됐다.


제자리 걸음수사

지금까지 경찰이 확보한 유일한 단서는 스나이퍼가 피해자들의 몸에 남긴 223구경 총탄일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인은 9일 중학생 저격 사건 현장 부근에 "나는 신이다"라고 쓴 타로 카드(점술 카드)를 남겨 경찰과 간접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 내용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다.

또 223구경 총탄을 사용하는 총기만도 수십종인 것으로 드러나 범인이 사용하는 총의 종류조차 특정하기 어렵다.

경찰은 범행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흰색 박스 트럭에 기대를 걸었다. 최근 범행이 벌어질 때마다 현장 부근의 주요도로를 완전 봉쇄, 박스 트럭을 샅샅이 뒤졌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헬기가 워싱턴 DC 일대 상공을 돌며 수시로 감시하고, 군대까지 수색에 동원되고 있지만 범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줄 것으로 기대했던 14일 사건의 목격 증언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급기야 제보가자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단순 살인행각인가, 테러인가

지금까지 경찰은 이번 사건의 테러 가능성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범인이 범행 후 자기의 주장을 남기는 테러리스트의 일반적인 형태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범행 대상도 인종,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공원 술집 등에서 여성 매춘부 동성애자 등 특정 유형의 피해자를 고르는 종전의 연쇄살인 사건과도 차별성을 띠고 있다.

이에 따라 살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고 싶어하는 정신병자의 '스릴 킬링(Thrill killing)'쪽에 무게가 두어졌다.

그러나 범행이 점점 대담해지고, 보다 치밀하게 진행되는 듯하면서 테러단체의 조직적인 개입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톰 리지 국토안보국장은 "FBI와 백악관의 그 누구도 테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의심받고 있는 조직은 알 카에다이다. abc 방송은 18일 FBI가 지난 주 한 테러범으로부터 "알 카에다가 3명으로 구성된 저격조에게 미국에 대한 공격훈련을 준비시키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관리들은 심지어 쿠방의 관타나모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 테러 용의자들을 신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 카에다가 이번 사건에 관련됐다는 어떤 증거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건이 미제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알 카에다의 범행쪽으로 몰아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1년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샅샅이 뒤졌어도 오사마 빈 라덴을 찾지 못했듯이 앞마다의 저격범도 잡지 못할 것"이라는 비아냥도 들리고 있다.


거리 썰렁, 불안감 증폭

워싱턴 일대 주민들은 "나도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외출 자체를 기피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으며 외출할때도 주위를 살피거나 종종 걸음을 걷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최근 범행의 표적이 된 고속도로 부근의 주유소나 쇼핑센터는 기피 장소 1순위로 꼽힌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 비교적 안전한 워싱턴 DC 시내에서 주유를 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모습이다

고속도록 부근의 한 텍사코 주유소에서는 저격범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파란색 대형 방탄천막을 쳐 둔 진풍경도 목격된다. 각급 학교의 모든 야외행사와 대항경기는 취소됐고 미식축구 선수까지 실내 훈련을 하고 있다.

야외식당은 한산한 반면 주문배달 음식점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대형 마켓들도 최근 손님이 줄어 매출이 20%이상 감소했다.

에모리 대학 심리학 교수인 바버라 로젠바움은 "범인이 사람들의 공포를 갖고 노는 것이 이번 사건의 특징"이라며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자기 생활을 보는 방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고 말했다.

입력시간 2002/10/3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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