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자니 찜찜하고 주자니 마땅찮고…"

"재계가 대선 후보의 경제정책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표는 이미 던져진 상태입니다. (전국경제인 연합회 K상무)" "예전처럼 대선 후보가 직접 정치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또 어떤 형태로든 기업들은 대선에 출마한 후보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대기업 A상무)" "재계에서 누가 MJ(정몽준 '국민통합 21' 신당추진위 대선후보)를 기업인으로 봅니까. 의정생활만 14년을 한 정치인을 현대중공업 고문이라는 직함때문에 재계인사로 분류할 수는 없지 않나요>(유력 경제 단데장 P씨)"


표정관리에 들어간 재계

재계가 차기 대권의 향방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재게의 공식 창구인 전경련은 황금색 가을빛 마냥 침묵한 채 말을 아기고 있다. 최근까지 주5일 근무제의 도입을 극력 반대했던 DJ 정권말 재계의 '목소리 키우기'는 정치권의 '대북 비밀지원설', '병풍' 공방과 후보별합종연횡 조짐이 가속화되면서 쑥 들어간 상태다.

재계를 대표하는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마저 10월19일 멕시코 방문 등 10여 일간의 외유에 나섰다. 재계는 정쟁 속에 대선이란 대형 이벤트를 준비 중인 정치권이 재계를 반대를 무릅쓰고 주5일 근무제의 연내 도입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이미 표정관리에 나섰다.

재계로서는 DJ정권 내에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올해 4월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해 도입하려던 증권 관련 집단 소송제 역시 재계의 반발에 밀려 국회 법사위에 상정된 후 입법화 과정을 밟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또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한 출자총액 제한제도도 당초의 원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질돼 버린 지 오래다.

정권 말 마지막 '재벌 길들이기' 카드로 꼽혔던 공정거래위원회의 6대 그룹 부당 내부거래 조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강도가 현저히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6대 그룹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 조사는 당초 에상과는 달리 기업공시 위반 등과 같은 곁가지만을 흔드는 '솜방망이'식 현장 조사만을 끝내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정권 말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이 경제부처 관계자들사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귀뜸했다.

S기업의 한 관계자도 "그동안 전경련등 경제단체 등을 통해 외친 재계의 메시지는 이미 전해졌고 이들로부터 '친(親) 기업' 공약을 이끌어낸 만큼 '절반의 성과'를 얻었다"고 자평했다. '정권은 유한 하지만 기업은 무한하다'는 역사적 진리가 또다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차기 정권의 보증수표를 받아라

삼성과 LG, SK, 현대자동차 등 주요 그룹들은 내년 경기의 '경(更) 착륙등 향후 경영환경이 극도로 불확실할 것으로 보고 비용지출을 줄이거나 올해 수준으로 동결하는 , '긴축경영'을 골자로 한 내년 사업계획안을 최근 발표했다.

그러나 그룹드의 속사정을 세밀히 들여다 보면 그 내용은 긴축보다는 투자에 무게가 더 실려 있다. 삼성과 LG, SK등은 오리혀 연구개발(R & D)과 설비투자를 그 어느때보다 확대 강화하는 '그랜드 플랜'을 각각 세워 놓고 있다. 경제학계와 재계 일부에서는 대기업들의 이 같은 내년 사업계획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이합집산의 양상을 보이는 정치권이 11월에 본격적인 합종연횡에 돌입할 경우 신규 정치자금 수요에 대한 요청이 재계로 집중될 수밖에 없고, 대선을 앞둔 시점에 기업들로서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차기 정권에 눈 동장을 찍기 위해서라도 지출이 불가피한 입장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막판' 지원 요청이 잇따를 11월, 각 후보진영에 선거자금을 지원할때까지는 정치권의 자금지원 공세를 피할 수 있는 방패막이가 필요한 것이다.

S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올들어 역대 사상 최대실적을 올린 대기업들이 굳이 대외적으로 '내년엔 긴축운영에 나서겠다'고 먼저 울상을 지어 보이며 발표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며 "무분별한 정치자금 요구에 선을 긋기 위한 선제방어책"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내년 새 정부가 내수진작 등 경기 부양책을 내놓으면, 그때 투자확대 계획을 발효하는게 기업의 '생존법'이라는 지적이다.

이와함께 각 기업은 선거전의 총알이나 다름없는 자금 지원 요청이 쇄도할 11월에 대비해 공식 루트보다는 정치권과 개별적으로 인맥이 닿는 내부 임원들을 '브릿지'로 세우고 정국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의 공식 창구인 전경련과 대한상공회의소 등은 정치 지원금 갹출에 대해 겉으로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계와 정치권의 유착 방지가 대외적 명분인 셈이다. 그러나 주요 대기업들은 벌써부터 대선 후보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정치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등지급 논란에 곤혹스러운 삼성

2002년 16대 대선에서 법정선거비용 준수와 선거자금 투명화 등 돈 안드는 선거를 공약으로 내놓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 후보는 10월12일 KBS 심야 대담프로에서 패널리스트로부터 '노 후보도 기업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한 동안 곤혹스러운듯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곧 "음…네,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재계 소식통에 따르면 삼성은 대선 후보들 중 당선 가능성이 높고 자사 그룹과의 친분 관계, 대선후보가 공약한 재벌정책과 경제정책, 노조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후보들에 대해 차등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이 같은 내부방침이 한 일간지 가판 신문을 통해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즉각 진화작업에 나서는 등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은 특별 대선분석팀을 운영하면서 현대가(家)의 분신인 MJ의 지지도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고, '현대상선의 대북 4억 달러 지원설'의 진원지가 삼성이라는 소문이 경제계에 급속히 퍼지면서 더욱 난감한 표정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대선출마를 밝힌 후 이건희 회장과 '승지원'에서 만나 대선지원을 요청하며 흉금없는 대화를 나눴다는 역(逆) 루머까지 나돌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최근 김대중 대통령의 둘째 아들인 김홍업씨의 서초동 아파트 구입과 정례적인 보조금 지원 등 정권 핵심부에 대한 삼성의 각종 로비 전력을 감안할때 이 같은 루머가 결코 뜬금없이 흘러나온 얘기는 아닐 것이라는게 재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한 그룹의 임원급 인사는 "삼성과 LG, SK 등 국내 3대 그룹은 이회창 후보에게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라며 "노무현 후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금이 지원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한동 전 총리의 경우 의외로 주요 그룹들이 호의적 반응을 보이며 자금지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그룹 관계자는 "대선 후보들로부터 직접 정치자금 제공을 부탁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주요 대선 후보들의 참모들과 그룹 주요 임원 및 일부 최고경영진(CEO)과 학연·지연 등으로 얽혀 있고 이들의 부탁을 완전히 외면하기는 어려워 어느 정도의 성의 표시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자금 요청이 쇄도할 11월까지 비자금·탈세 시비가 있을 수 있어 매우 조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몸 낮춘 현대家

MJ에 대한 재계의 입장은 댜른 후보와 다를 수 밖에 없다. MJ를 기업인이라고 보기에는 정치인의 색채가 너무 강하고 정치인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재계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재계는 MJ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을 껄끄러워 한다.

그러나 MJ가 정식으로 신당을 창당하고 대선 막바지인 11월 중순까지 이회창 후보와 대등한 지지도 싸움을 벌일 경우 '보험금' 차원에서라도 일정 액수 이상의 자금 지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MJ의 대선출마 선언 이후 '정경분리' 원칙을 선언한 현대자동차 등 현대가는 몸을 최대한 낮춘 채 MJ와 관련한 모든 사항에 대해 철저히 언급을 피하는 '묵묵히'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지난 추석 휴가철에도 MJ를 포함한 '현대 패밀리' 모임을 주시하는 외부 시선을 의식해 해외 출장에 나서는 등 MJ와 거리감을 두려는 자세가 역력하다

특히 최근 기아자동차에 대한 국세청의 정기 법인 세무조사를 비롯, 현대자동차의 특소세 탈루 조장 의혹 조사와 공정위의 계열사간 고가거래 등 부당 내부거래 조사등이 잇따르자 현대·기아차측은 극도로 긴장하는 분위기.

또 현대상선의 4억 달러 대북비밀지원설과 관련, MJ의 발목을 잡으려는 정치권의 '현대가 죽이기' 공세가 국민통합 21 신당의 움직임이 본격화할 11월부터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고 계열사 별로 내부단속을 강화하고 대응 전략에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현대·기아차가 어떤 형식으로든 MJ를 지원할 것이라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재계 환 관계자는 " MK(정몽구 회장)가 최근 동생의 지지도 급상승에 대한 보고를 받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얘기"라며 "MJ가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현대중공업의 지분을 일부 매각할 경우 그 지분을 MK가 대신 인수해 주는 금전적 지원외에도 대한축구협회 후임 회장직을 맡는 방식 등 다각적인 측면 지원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 4억 달러 대북비밀 지원설의 열쇠를 쥔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은 대선이 끝나는 연말까지 미국에 체류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LG는 무풍지대인가?

삼성과 현대와는 달리 SK와 LG는 전통적으로 그다지 '정치 바람'을 을 의식하거나 타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두 그룹은 다른 기업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일상적인 후원금을 지원하는 것 외에 특별한 '플러스 알파'는 없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손길승 SK회장은 올해 초 한 조차모임에서 "부당한 정치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손회장은 당시 "요즘 기업치고 '이것 좀 봐주시오'라고 자금을 주는 곳은 없지만 '우리를 나쁘게만 하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지원하는 것"이라며 "정당한 정치자금 요구에는 응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정치자금을 지원할때 옥석을 가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는 "경조사 문제로 종합병원에 가서 어느 집에는 들르고 어느 집에는 들르지 않으면 그 집은 몹시 섭섭해 하지 않겠느냐"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연초에 표명한 손 회장의 입장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기업의 생리상 옥석을 가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주지 않는 형태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SK도 정치자금의 무풍지대 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LG는 기업회계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내용을 이례적으로 증권거래소에 공시했다.

LG칼텍스가스는 9월 11일 이사회 결의를 거쳐 한나라당 중앙당후원회에 2억원을 증여했다고 공시했다. LG 관계자는 "회계연도 총 증여액이 자본금의 10%를 넘으면 공시를 하도록 한 상장사 공시규정에 따라 한나라당에 2억원의 정당 후원급 제공 사실을 투명하게 밝혔을 뿐" 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처럼 각 기업별로 대선후보에 대한 입장과 지원방식은 다르지만, 표심(票心)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급변하는 정치적 역학구도에 대한 대응전략 수립에 골몰하는 것이 대선을 앞둔 재계의 모습이다.

입력시간 2002/11/0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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