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제철 만난 줄서기

은행에 일이 있어서 갔을 때였다. 대기표를 뽑아들고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 앞에 앉은 중년 주부 3명의 얘기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네. 누굴 찍지?”

“난 000 찍어줄거야. 불쌍하잖아.”

“그 사람이 뭐가 불쌍해? 난 000이나 찍어줄까? 나랑 동향인데.”

“촌스럽게 지역 따져? 아무나 찍어. 다 그나물에 그밥이야.”

까르르 웃어대는 중년 부인네들의 낭자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드디어 대통령 선거가 그네들의 말처럼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실감했다.

사실 그 동안 월드컵에다 아시안 게임, 그리고 여기에 여러 사회적인 사건들이 터져나와 도대체 이 나라 국민들이 대선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참이었다. 예전처럼 누가 대통령이 될지를 놓고 입에 거품을 물고 토론을 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지역을 따져가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말초적인 감정싸움도 거의 구경할 수 없던 터였다.

이미 역대 대통령들에게 실컷 실망과 민망한 결과만 맛봐서인지 다들 선거 당일 날의 기분상태에 따라 아무 칸에나 찍자는 분위기가 적지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쩐 일인지 처음에는 다들 야무진 포부와 겸허한 태도를 갖춘 훌륭한 대선 후보였던 사람들이 그 높은 자리에만 앉으면 하나같이 중병에 걸리는지 국민들에게 “내가 어쩌자고 저 사람을 찍어 줬을까”라는 자책만 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찬바람이 부니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갖고 그래도 누가 덜 허물이 있는 후보인가 따져보게 되나 보다.

얼마전 택시에 탔을 때도 나를 알아본 기사가 은근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대권후보 3명을 대상으로 유머집을 낸걸 기억한 택시기사는 누구의 책이 더 많이 팔렸는가를 물어보며 나를 포섭까지 하려 했다.

“000 찍어줘요. 그래도 그만한 인물이 없다니까. 근데 작가분은 솔직히 누굴 미슈?”

일반 국민들은 서슴없이 누굴 찍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연예인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들이 행사에 많이 불려 다니지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며 나서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연예인들이 자신의 정치성향을 밝히며 누구를 지지한다고 나서면 사람들은 대뜸 “지가 뭘 안다고 설쳐?”하며 비아냥거리거나 “그냥 연기나 하고 노래나 부르지.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하며 폄하하기 일쑤다.

미국의 연예인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당당히 밝히고 소신에 의해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거액의 선거자금을 기부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이다. 또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떨어졌어도 나중에 정치적인 보복이 가해지는 일도 없다.

연예인 A씨는 전에 특정 후보를 소문나게 지지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후보는 대통령이 됐고 A씨는 특정 단체의 높은 직위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A씨의 모습은 슬그머니 TV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의 말대로 위에서 과거 A씨의 행적을 빌미 삼아 모종의 지시가 내려졌는지 아니면 방송국 사람들이 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알아서 기었는지 모르지만 5년 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를 임기 말이 다가오는 요사이에 가까스로 보게 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다.

줄 한번 잘못 서면 임기 내내 미운 털이 박힌 채로 제대로 활동을 못한다는 믿는 연예인들은 그래서 알게 모르게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똑똑한 바보 노릇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연예인 B는 요즘 마치 철만난 고기 마냥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고 바쁘다. 낮에는 이 후보의 행사에 나타나고, 밤에는 저 후보의 행사에 나타난다. 철새마냥 각 후보 진영을 돌아다는 B가 걱정스러워 몇 마디 해주었더니 이 친구의 답이 걸작이었다.

“에이, 형, 솔직히 누가 될지 모르잖아. 누가 되던지 아무 덕이나 보면 되는거지 뭐.”

입력시간 2002/11/0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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