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배가 들어와야 할텐데…"

돈 가뭄에 목마른 정가, 대선자금 확보에 비상

가을 비가 낙엽을 흠뻑 적신 10월21일 오후. 6월 월드컵 열기가 아직도 생생한 서울 상암 경기장 내부에 마련된 100평 규모의 VIP룸에서는 때아닌 중년 여인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은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까지 정ㆍ재ㆍ군ㆍ관계 실세(實勢)의 ‘안방 마나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TK 여성인맥의 핵인 경북여고의 재경 동창회였다. 서울 회원만 7,000 여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모임으로 김옥숙 여사(노 전 대통령 부인)등 내로라 하는 거물급 인사 부인들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이날 참석한 700여 명 회원들의 눈길을 끈 ‘마님’은 다름아닌 경기여고 출신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부인 한인옥 여사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발언 파문이후 공식행사 참여를 자제해 오던 한 여사는 “가까운 분의 권유로 이 자리에 초청을 받고 잠시 고민했지만 여러분을 만나게 돼 반갑습니다”며 참석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지원을 호소했다.

대선 후보들에 대한 기업들의 정치자금 ‘개별 차등 지원설’이 재계에 확산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정계에는 ‘10월 돈 가뭄’이 극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에는 자금 압박설이 나돌고 한나라당은 100만 당원을 대상으로 1만원 모금운동을 실시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여의도 정가에 떠돌고 있는 ‘민주당 부도설’ 등 괴소문에 발끈해 진원지 추적에 나서는 한편 법적대응까지 불사할 태세다. 괴소문의 내용은 민주당이 6ㆍ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200여 억원의 빚 등 심각한 자금난으로 대선을 제대로 치르기 어렵다는 ‘민주당 부도설’이다.

당 살림에 관여하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만약 소문대로 채무가 200억원 정도에 이른다면 최근 일고 있는 신당 창당 논란에 채무자들이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며 “당 운영을 위한 채무로 미지급금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라고 소문을 일축했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 따르면 10월17일부터 ARS와 휴대폰 모금을 통해 모아진 후원금은 24일 현재 8억 여원.

또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 은 회사원의 급여일인 25일을 ‘노풍(盧風) 폭발의 날’로 선포하고 노풍 재점화를 위한 대대적인 후원금 모금에 나섰다. 노 후보 진영은“최근 개미군단의 온라인 기부가 쏟아지고 있어 ‘제2 노풍’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며 “서울 강남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후원자 오 모씨는 12월1일까지 10억원을 모금하지 못하면 개인 돈 5,000만원을 내겠다고 가계수표를 전달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 관계자들은 “개미군단의 지원금이 쇄도하고 있지만 사실 대선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며 “이 때문에 당에서도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라고 우려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나라당 역시 자금사정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은 분위기다. 한나라당은 연말 대선을 의식한 강도 높은 자금 갹출 방안 마련에 돌입했다. 최근 김영일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기자들과 만나 “연말 대선 전에 중앙당 차원의 후원회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다”며 “100만 명 당원이 1만원씩 모금 캠페인을 벌여 최소한 100억원을 모아야 각 시도부가 대선을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북여고 동창회에 참석했던 한 여성은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한나라당의 100만명 모금운동에 동참하자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당에 납부하는 후원금 납부액 순위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에게 직보되는 ‘1급 기밀’. 의원들의 후원금 성적표는 곧 개개인의 ‘충성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돼 자금 동원력이 뛰어난 사람이 중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11월에 접어들면 본격 자금확보에 두 팔을 걷어 올려 붙여야 할 상황”이라며 “ ‘11월 만선(滿船)’을 끌어오기 위해 한창 고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정치판에는 벌써 대선자금 확보를 위한 ‘11월 게임’의 막이 올랐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2002/11/01 17:34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