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직 종사자 "아! 옛날이여"

의사, 변호사 몸값 폭락... '士'자 수난시대

이른바 ‘사(士)’자 직업 종사자들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 고소득 종사들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업계가 ‘무한 경쟁’ 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자 종사자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합격=출세’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잇따른 불미스러운 사건 연루도 이같은 하강세를 가속시키고 있다. 업계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등 명예와 신용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다.

올 초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김모(32)씨. 그는 5번의 도전 끝에 가까스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늦깎이 법조인이다. 그러나 김씨는 요즘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장밋빛 청사진을 기약하며 사법고시에 도전했던 지난날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김씨가 들어간 곳은 여의도의 한 대기업. 김씨는 이곳에서 금융 관련 분쟁을 처리하고 있다. 그 어렵다는 변호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지만 하는 일은 일반 샐러리맨과 차이점이 없다. 출근이나 퇴근시간도 비슷하다.

김씨는 “사법고시 합격이 장원급제로 여겨지던 시대는 지났다”며 “과거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출세가 보장됐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토로했다.


토익, 토플 성적표 추가

김씨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원하던 곳은 아니지만 ‘비빌 언덕’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사법연수원을 나오고도 직장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의 서정찬 변호사에 따르면 판사나 검사에 임관하지 못한 사법연수원생들은 보통 대기업이나 로펌(종합법률사무소), 혹은 정부기관 등에서 경력을 쌓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수효는 한정돼 있는데 반해 공급이 늘어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서 변호는 “취업을 희망하는 사법연수원생들의 이력서를 보면 전쟁을 방불케 한다”며 “경쟁자들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띠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고 설명했다.

규정에도 없는 토익(TOEIC)이나 토플(TOEFL) 성적표를 추가하는 것은 기본이다. 연봉란을 따로 만들어 중소기업 신입사원 정도의 연봉으로 낮춰 부르기도 한다. 최종 결정권자에게 ‘알아서 기고 있다’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마저도 마땅치 않은 응시자들은 대학 재학 당시의 이력까지 총동원한다. 일반기업의 치열한 신입사원 응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개업 변호사로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새내기 수준의 경쟁력으로는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길거리로 나앉을 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변호사협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개업 변호사수는 5,000여명 선. 이정도만 해도 이미 시장이 포화상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법시험 선발 예정인원은 1,000여명 정도로 잡고 있다. 때문에 조만간 업계는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한결 같은 전망이다.

이같은 ‘이상 기온’은 자본주의의 꽃으로 통하는 회계사나 변리사, 의사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한때 사법고시 출신과 같이 ‘신랑감 후보 영순위“였다. 그러나 요즘 사정은 그렇지가 못하다. 일부 경쟁력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피말리는 취업 전쟁

한국공인회계사에 따르면 올해 삼일, 안진, 안건, 영화, 삼정 등 5대 대형 회계법인의 채용 인원은 300여명 선. 그러나 정부는 올해 지난해의 두 배인 1,014명의 공인회계사를 선발할 예정이다. 중소 회계법인의 경우 이미 포화 상태라 업계는 올해도 피말리는 취업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공인회계사회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밀려있다”며 “이같은 현상은 공인회계사 시험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취업을 하지 못한 일부 변리사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120명이던 선발인원이 지난해 200명으로 늘어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대한변리사회의 한 관계자는 “변리사 시험에 합격하면 특허청에서 1달, 특허사무소에서 11달 등 1년 동안 수습기간을 거쳐야 한다”며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고도 특허사무소에 들어가지 못해 애를 태우는 합격자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에 비해 병원들은 수술할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우고 있다. 의대 학생들이 외과, 방사선과, 해부병리학과 등 힘들고 고된 과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직 의사가 없어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정도다. 일선 의사들도 ‘돈이 되는’ 성형외과, 안과, 피부과 등을 중심으로 개업이 늘고 있다.

이렇듯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졌던 전문직 종사자들의 수난이 계속되고 있다. ‘합격=출세’란 인식이 변화한지 오래다. 여기에 더해 일부 전문직 종사자들이 각종 비리 사건에 연루되는 등 스스로 명예를 갉아먹고 있다.

검찰은 최근 사건 알선 대가로 브로커들에게 수천만원의 금품을 제공했던 수임 비리 변호사들을 무더기로 기소했다. 얼마전에는 회계사가 분식회계와 관련돼 국내 최초로 구속됐다. 의료계에서는 파업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명예 실추는 자업자득

사정이 이렇자 결혼정보회사에서는 ‘옥석고르기’가 한창이다. 결혼정보회사인 P사는 올 초부터 특별관리회원 중 여성 회원이 원할 경우 계약서에 특별한 조항을 첨부하고 있다. 요컨대 사법연수원 남성을 소개받을 경우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 현실화되고 있다”며 “최고 엘리트로 꼽히는 사법연수원생들도 이 정도인데 나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한창이다.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한 변호사는 “전문직 종사들의 명예 실추는 자업자득일 수 있다”며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는데 전문직들은 여전히 과거의 부와 존경을 누리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 반론이 나오기도 한다. 정민근 안건회계법인 전무는 “최근 예금보험공사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부실회계에 대한 책임으로 회계법인에 소송 제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그러나 현재 논의되고 있는 책임의 범위는 외부 감사인으로서 회계사가 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사법연수원 졸업생 연봉 100만원 시대(?)

법무법인 율촌의 서정찬 변호사는 최근 특이한 이력서를 접했다. 한 사법연수원 졸업생이 연봉을 100만원으로 기재해 취업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서 변호사는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알고 보니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깜짝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사법연수원생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도 다양해지고 있다. 평범한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로는 눈길을 끌지 못한다고 판단, 요구하지도 않은 경력 증명서나 자격증을 첨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력서 양식에는 연봉란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 응시생들은 자신의 몸값을 낮춰 지원하고 있어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서 변호사의 말이다. 일부 지원자들은 헌혈 증서나 봉사활동 경력 등 사소한 부분까지 총동원한다. 어떻게 해서든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보려는 심산이다.

서 변호사는 “얼마전 사법연수원생을 대상으로 재경부가 2명의 특별채용을 실시했는데 32명이 몰렸다”며 “몇년을 고생해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또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이석 르포라이터

입력시간 2002/11/01 17:4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