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통일의 시인' 고은

며칠 새 부쩍 쌀쌀해진 만추의 오후, 햇살이 소주잔의 그림자를 뉘엿뉘엿 길게 눕혔다. 시인은 서서히 기분 좋게 취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10월 22일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에서 열렸던 준공 개관식 자리에서 그는 건립위원회의 고문 자격으로 참석했다. “거기서 점잔빼고 있느라고 혼났네.” 옥외에서 40여분 동안 열렸던 엄숙한 자리의 뻣뻣함을 눅여 보려는 듯 그는 웬 술집 간판을 발견하고는 먼저 성큼성큼 향했다.

“추울 때 술 한 잔이 부모 같잖소.”

목로 앞에 앉아 고은(69) 시인은 화두를 뗐다. 노시인이 던진 술의 메타포가 쌀쌀 맞은 날씨를 토닥거리는 위안처럼 따뜻했다. 2000년 8월 북한의 오영재 시인과 최초의 남북합작시 ‘만나고 싶었습니다’를 지을 때에도 술이란 얼마나 소중한 가교였던가. ‘아, 집으로 초대하여 밤 이슥토록/ 술잔에 얼굴 붉어진 기쁨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라고 시인은 적었다.

술을 한 번 들이키면 새벽을 쉽사리 넘긴다는 그는 사실 21일에도 밤을 새며 술을 마셨던 터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두 사람과 인사동 술집에서 밤을 훌쩍 넘겼다. 젊은이들을 무색케 하고도 남을 뜨거움이다. 젊은 시절, 그에겐 그가 술에 젖어 뱉은 말을 옮겨 적는 문우(文友)도 있었다.


배반의 매력이 술을 사랑하게 해

새벽까지 이어지는 폭음은 여전하다. 소주나 중국술 공가두주(孔家杜酒)를 즐긴다. 최근에는 초청 연설 등으로 해외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프랑스 호주 미국 칠레 등지의 포도주를 음미하는 도락까지 생겼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평양 초대소(호텔)에서 맛본 북한 포도주의 맛을 당할 술은 아직 못 만났다.

‘왜 술을 그리 사랑하는가?’라는 우문에 그는 “술은 술 마시는 자를 배반하는 것이다. 배반하니 매력이 있다”는 현답을 돌려 준다. 그는 여전히 ‘허난설헌과/ 소주 마시는 꿈도 꾸다’가 ‘분홍돼지 삼겹살 안주 앞에서/소줏잔/ 거푸 받으며 호언장담’한다(‘테제 놀이’)

10월 30일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김영사 주최로 열린 ‘고은 전집 출판 기념회’는 이 가을을 아쉬워 하는 수확의 자리였다. 모두 38권을 다닥다닥 붙여 보니 전체 길이 1.8m에 달하는 고은의 시와 시들이 빛났다.

신경림 황지우의 축시에, 이시영의 약력 소개, 김지하 황석영의 축사가 어우러졌다. 평론가 이시영의 약력 소개에 이어 백낙청 교수가 우인(友人) 대표로 축사를, 문학 평론가 김우창이 ‘오늘의 문학을 말한다’라는 제하로 고은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짚었다.

2002년 만추의 바람은 그에게는 그 어느 때에도 비길 수 없는 수확의 기쁨을 선사한다. 전집 출판에 이어 11월에는 민음사에서 70여편의 근작시를 모은 단행본 ‘늦은 진실’을, 12월에는 문학사상사에서 ‘고은 시선’을 발행한다.

‘늦은 진실’에서 그는 자신을 관통해 간다. ‘나는 삼라만상이었다/ 나는 무당벌레였고/ 암소였고/ 불개미의 하나였고/ 야차였고(중략) 나는 고려말 천안 삼거리 술집 중노미였고/ 조선 중기/ 부안 뱃사공이었다’(‘나’). ‘지혜는 후회이다/모든 종교 가라’고 그는 호령한다’(‘테제 놀이’). “해방이오, 바람 같은. 자기 해방과 세계 해방, 나아가서는 언어로부터의 해방, 역사로부터의 해방말이오.” 자기 문학의 본령을 그는 단 한 단어로 압축했다.

정권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시인을 1977년, 79년, 80년, 89년 등 모두 네 번이나 옥좼다. 그는 맨 먼저 보안사(현 기무사),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검찰과 경찰의 조사실로 스스로 걸어갔다.

워낙 알려진 명사라 중앙정보부와 경찰 정보과에서 각각 파견된 형사 두 명이 항상 그의 거동을 챙기고 있던 터에 ‘도바리’ 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애꿎은 사람들 욕보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숨겨주겠다는 외국인의 호의도 물리치고 “잡혀 주었다”. 험한 세월은 그의 두 귀에 인조 고막을 남겼다. 1979년 조사 도중 마구잡이로 구타를 당해 고막이 파열되는 바람에 감옥서 받은 수술 흔적이 채 아물기도 전, 이듬해에도 구타로 고막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증오에 무력하다. 내겐 취할 힘밖에 없다”고 자기 주량이 도대체 어디까진 지 모른다는 시인은 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수령 미국에 대한 태도는 갈수록 단호해져 간다. 그는 “부시는 지구의 재앙”이며 “나와서는 안 될 사람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시가 미국의 신성한 본질에 위배되는 사람”이라면서 자신이 반미주의자는 아님을 강조했다. “나는 미국 시민들을 좋아해요. 얼마나 근사해, 또 황홀해.”

시인은 명한다.‘미국은 하루 5억톤의 쓰레기를 생산한다/ 위대하다…오직 부시 미국은 위대하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하와이인가 아닌가/조선민주주의 인공은/미국의 아프간인가 아닌가/ 닥쳐/ 이 새캬 서당개야’(‘미국’60) 세계화란 무엇인가? ‘가장 강한 나라가/ 가장 약한 나라를 치는 것이 세계화 작전이다’(‘큰 이야기’101)

그는 세계화 광풍 속에서 통일을 본다. 그는 1980년대를 달궜던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실재적 통일에 크게 기여한 바도 없이, (민족경제론을 주장했던) 박현채의 죽음으로 끝난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제 통일과 관련한 우리의 태도는 ‘살아 봅시다’로 돼야 한다.

이론의 사회는 그만 만들고 살아 본 산물로서의 이론이 필요한 때”라는 강조다. 실천 지침으로는 분단으로 비롯된 적대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평화 공존 체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논지다.


“통일의 고통을 준비해야 할 때”

통일의 정서란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오래 오래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 바라보자/ 아 내 마음속 금강산 1만2천봉’(‘금강산’). 그 정서는 이렇게 체현된다. ‘나는 남쪽에서 온 사람이오/ 반갑습니다/ 이런 인사 없어도’(‘삼지연 젊은 아낙’). ‘북한 양강도 백무고원 숨은 감자꽃/ 아침 찬 이슬 함초롬히/ 나이 스물 셋이나 넷쯤으로/ 젊은 아낙’의 싱그러움이 시로 거듭났다.

‘이제 만나러 간다/ 이제 만나러 간다/ 너를 너 또한 만나러 온다/ 나를/ 하나의 심장 뜨겁게/ 내 조국 삼천리 강산이 고동친다/ 이제야 만나러 간다 간다 간다 온다 온다’(‘만나러 간다’)

2000년 8월 17일 하야트 호텔 만찬장의 남북 정상회담 자리는 그와 북한의 계관 시인 오영재(66)가 만나 초유의 남북 합작시 ‘만나고 싶었습니다’가 탄생한 자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통일로써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그는 다짐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하나의 민족이 되면/ 뼛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 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예감한다(‘대동강 앞에 서서’). ‘경의선 경원선을 이어 오고 갈/ 수많은 8ㆍ15들이 내려’올 때 조국의 8월은 완벽할 것이라고 노래한다(‘새로운 8ㆍ15’). 완벽의 날은 멀지 않았는가.

‘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가 서울의 독일문화원 강연을 위해 2001년 첫 내한했을 때, 시인은 그를 만나 술로 환영했다. 당시 그는 “분단의 고통 보다는 통일의 고통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야 한다”고 그라스에게 말했다. 이제 그는 “통일은 통일의 시작일 뿐”이라며 “통일하고 100년이 지나야 통일은 일상화되는 것”이라고 전망한다.

시인은 안성에서 20년전 결혼한 부인 이상화(55ㆍ중앙대 영문과 교수)와 함께 일상을 꾸려간다. 그 사이로 아들 고차령(17)이 있다.

안성 땅에 솟구친 산맥을 그대로 이름으로 빌어 쓰는 차령은 현재 영국 채틀람시의 한 고등학교에 유학 가 있다. 미국의 하버드와 버클리 등 미국 명문대에서 자신을 부르는 통에 차령이를 딱히 거둘 데가 없어 아내의 동창이 있는 곳에 맡겨 놓았다.

8월부터 그는 90년대 중반 15권까지 쓴 대하시 ‘만인보’를 다시 쓰고 있다. 16~20권을 완성하면 창작과 비평사에서 책으로 펴낼 생각이다. 정작 동네 사람들은 그가 글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한다. 친한 농부들과 길거리에서 만날라치면 “올해는 풍년”이라는 둥 일상 생활 이야기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는 다짐처럼 예언했다. “‘만인보’는 (내가) 북녘으로 갈 때 완성될 것”이라고.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 7호 특별 감방에서 구상된 대하 연작시 ‘만인보’는 역사 속에서 이름없이 사라진 ‘할아버지’나 ‘머슴 대길이’의 이야기다. 1986년, 1988년, 1989년 세 차례 걸쳐 15권까지 선보인 ‘만인보’는 2003년 상반기 중으로 16~20권을 덧붙여 대미를 본다.


오부지기명…나는 아직 모른다

그는 “나는 아직 모른다”고 했다. 술기운이 조금 뻗쳐 ‘오부지기명(吾不知其名)’이라고 시인은 일필휘지했다. 그 도저(到底)한 불가지론은 근작 ‘시’에서 이렇게 다시 몸피를 슬쩍 드러낸 바 있다. ‘어느 날은/ 손님인가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주인인가 하였습니다// 이런 세월/ 굴뚝들/ 저마다 피워 올릴 연기를 꿈꾸었습니다// 오늘도 모르겠습니다 시가 누구인지.’

그렇게 그는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고 세계’임을 줄기차게 실천하고 있다(‘만인보’ 서시중). “내 최고의 명예는 내가 학생이라는 사실이다. 내 송장도 학생일 것이다. 교사는 사람, 세상이다.” 술 한 잔의 온기가 말했다.

또 다른 만인보, 그 원융(圓融)의 세계로 그는 걸어가고 있다. 그 걸음걸음 위로 ‘빵처럼, 밥처럼 절실한 평화(2000년 UN 총회단 단상에서 읽은 UN 평화 정상회의 축시 중에서)’가 내려 앉을 것이다.

‘3차 갈까/ 이제 그만 꺽// 자네의/포스트는 이후인가 인간 이후 미생물인가// 아니/ 내 포스트는 다시라네 꺽 다시 인간 시작이라네/ 포스트모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 포스트……꺾 // 두 사람 비틀비틀 퇴장하고 빈 잔에 희망 고스란히 남다’(‘빈 잔’). 순배를 다 한 뒤,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시인의 뒷모습이 희망처럼 따스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1/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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