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금지된 사랑의 '포로'였다

원로작가 전숙희 '여간첩 김수임' 전기 펴내

‘김수임이 노을 빛에 취해 있는 동안 사형 집행관은 사수들에게 손짓으로 발사 명령을 내렸다. 순간, 다섯 발의 총알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명중했다. 그녀의 머리는 앞으로 꺾이고 심장에서는 선혈이 분출한다. 죄목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나이는 서른 아홉살. 6ㆍ25 전쟁의 암운이 가득한 해방 공간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혼미를 향해 치닫고 있던 1950년 6월 16일 오후 7시 47분, 여간첩 김수임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강국은 북한의 정적들에 의해 6ㆍ25 전쟁 패전을 구실로 1955년 12월 10일, 북한에서 총살된다. 김수임에 빠져 미 군정의 간첩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숨질 당시 그의 나이 49세. 젊은 시절부터 키워 온 애국의 꿈을 펴보지도 못 한 채 분단 한국의 희생양으로 그의 생은 끝났다’.

냉전 논리의 희생양인가, 이중 간첩 마타하리의 한국판인가. 김수임이 역사의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원로 작가 전숙희(82ㆍ한국현대문학관 이사장)씨가 김수임의 전기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를 펴냈다(정우사).


이념의 장막을 벗겨냈다

이 책은 김수임의 진실을 가려 온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벗기고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끝난다. 그 동안 김수임은 희대의 여간첩이었다.

미군정 헌병사령관의 내연의 처이면서 남로당 간부 이강국의 애인으로 이강국의 마수에 걸려 희생당한 불행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이강국은 약하고 판단력 없는 김수임을 끄나풀로 미 헌병 사령관을 이용, 개성으로 넘어갔다는 소문만이 분분했었다. 1951년의 어느 신문 제목대로 ‘애정유죄(愛情有罪)’였던가?

책은 친 자매처럼 지내던 김수임과 모윤숙이 1929년 12월 함흥형무소의 이강국을 면회한 일에서 출발한다. 1929년 일제 치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함흥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그를 만나러 가던 김수임과 모윤숙의 이야기다. 이튿날부터 김수임은 뜨개질을 시작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사람은 첫 눈에 반했다. 두 사람은 남편의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에 머물고 있던 이강국의 조강지처를 위로 방문까지 했다고 책은 서술한다. 여간첩, 심지어는 탕녀라고까지 매도되던 김수임이 실은 얼마나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 분단과 냉전이 인간을 어떻게 희생시켰는지를 책은 이야기해 나간다.

그러나 세인의 눈에는 사랑이 무르익은 유부남과 미혼녀의 동거일 뿐이었다. 계산이고 지적인 이강국이 약하고 판단 없는 김수임을 통해 미 헌병사령관의 정보를 빼냈을 뿐 아니라 그의 힘으로 개성으로 넘어갔다는 동정론이었다.

모윤숙 시인의 구명 운동에도 불구, 6월 16일 벌어졌던 마지막 재판에서 법정은 사형을 언도했다. 재판장이었던 김백일 육군 대령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요지였다.

모시인은 “종달새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던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다”며 “간첩 행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지른 것은 이강국에 대한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며 명 변론을 펼치기도 했다.


모윤숙과 이화여전 기숙사 룸메이트

김수임과 이강국은 삶의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김수임은 고아였다. 1911년 3월 1일 개성 선죽교 아래 빈민촌에서 태어났으나 곧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집안은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 11세에 민며느리로 15세의 신랑에게 팔려 갔다.

명랑하며 솔직한 소녀였던 그녀는 철 없는 신랑의 횡포를 못 이겨 가출, 예배당에 들렀다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경해 새 세계를 알게 된다. 당시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로 성장한 그녀는 이화여전 영문과에 들어가 작가 모윤숙과 기숙사 룸 메이트로 지냈다.

이강국은 1906년 경기 양평의 몰락한 사대부 집안 차남으로 쾌활하고 저돌적이었다. 마침 옆집에는 뒷날 시인이 된 임화. 어려서 친구였던 둘은 결국 생사까지 함께 한 동지로. 일본의 타도에는 일본제국주의가 공산주의 혁명으로 붕괴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지식인들은 동의하고 있었다.

키 크고 호남형의 이강국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론’을 두고 열변을 토했는데, 그녀는 한 독서회에서 그의 명강의를 접하고 흠뻑 빠져 들었다. 김수임은 모윤숙에게 “로자가 여성이어서 더 호기심이 당긴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강국은 그러나 이중 첩자로 내몰릴 운명이었다. 국제적 식견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겸비한 문장가이자 웅변가였던 그는 북조선의 정적들로부터는 남조선에서 친미파로 활동했다고 오해 받았다. 반면 남조선에서는 김일성의 충성파로 분류돼 일거일동을 감시 받았다.

그를 잘 아는 주변에서는 포용력과 겸손 등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평가해 10년후의 대통령감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원산 철도국 사건 등으로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던 그는 해방을 맞아 민주주의 민족전선 사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공산당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미 군정을 강력 규탄해 체포령이 떨어진 그는 월북한 뒤 인민군 병원장 등으로 고위직을 지냈다. 그러다 1953년 남로당 숙청 사건에 연루돼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고 만 것이다.

문장의 질감은 실증적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인간적 비망록에 가깝다. 바로 김수임을 지척에서 지켜 본 저자 전숙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평전에서 그는 이념이나 분단 등 거대 담론에는 아예 발을 들이밀 생각이 없다. 그는 학교 선배인 김수임의 따뜻한 인품과 순진함에 반했고, 혈혈단신이었던 김수임은 그를 친동생처럼 믿고 사랑했다고 기억한다.


서울 변천 풍속에 관한 기록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쓰기로 마음 먹어 오다 접어두기를 거듭했던 전숙희씨가 집필에 매달린 것은 2002년 7~8월 꼬박 두달이었다. ‘대~한민국’의 함성으로 불태웠던 6월의 열기 속에서 작가는 새 시대가 왔음을 절감하고 그 동안 묻어 둔 이야기들을 길어 올렸다.

김수임과 이강국을 지척에서 지켜봐 온 시인 모윤숙의 1950년도 일기도 책의 말미에 수록돼 인간 김수임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당시 모윤숙이 펼쳤던 40여분 동안의 변호 진술은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책은 또 1930~50년대 서울의 변천사와 풍속사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세브란스 병원의 탄생, 반도 호텔 변천사와 미군 진주 당시의 호텔 풍속 삽화, 분단 정국의 밀실 정치 현장인 낙랑 클럽, 미 고급장교의 일상 등 당대 사회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글의 신빙성을 더 한다.

김수임과 미 군정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 사이에 태어난 유일의 혈육 김원일(53)씨는 1969년 도미해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1997년 연극 ‘나, 김수임’의 공연 때와 지난해 책의 출판에 맞춰 귀국하기도 했다.

‘나, 김수임’은 여간첩이란 통념을 뒤집고 김수임을 여인으로 환생시킨 무대였다. 해방 전후 최고급의 엘리트로 손꼽혔던 이강국과의 사랑앞에 모든 것을 포기한 순애보적 주인공이라는 기본 시각에 인기 배우 윤석화의 열연이 운을 맞췄다.


"이중간첩 매도는 역사의 폭력"

공연 당시 극장을 찾은 김원일씨를 만났던 작가 정복근씨는 “어머니의 일로 괴로움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 아픈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가 매우 깊은 인물이었다”며 “예상과는 달리 유창한 한국어가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정씨는 “김수임을 이중 스파이로 매도해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도식화한 통념은 역사의 폭력”이라며 “그녀는 익숙치 않은 서양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한국인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수임은 서구의 이념에 휘둘린 한국의 아픈 역사를 반성하는 계기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북한은 둘의 사랑이 결국 미국 첩보전의 일부로 단정했으나 현재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냉철히 검토돼야 할 역사적 과제”라며 “간첩 김수임을 인정을 지닌 인간 김수임으로 전환시켰다”고 평가했다. 책은 결국 분단 상황때문에 빚어진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인의 삶을 어떻게 왜곡시켰던가를 말한다. 최근 달아 오른 통일 논의가 귀기울여야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1/01 18:5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