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사랑과 평화(上)

미 8군 무대에 선 한국밴드로는 최고 등급인 ‘스페셜 A’ 프로 연주가들로 결성된 ‘사랑과 평화’는 사이키델릭 멜로디의 신중현에 필적하는 흥겨운 흑인 펑키 리듬으로 가요계에 충격파를 날렸던 최정상 록 밴드였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대학생 가요제 등으로 양산된 아마추어 록밴드들의 아우성 속에서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연주와 독특한 편곡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비록 앨범 발표 때마다 겪었던 멤버 교체의 상흔은 선명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과 평화는 굳건하게 그룹 이름을 유지하며 최장수 록그룹이란 ‘명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사랑과 평화는 1974년 결성된 ‘서울나그네’의 멤버들인 리드기타 최이철, 키보드 김명곤, 베이스 이남이, 퍼커션 겸 보컬 이철호, 드럼 김태홍에 세컨드 기타 이근수가 가세한 6인조로 시작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이들에게 대중적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은 동양방송 DJ겸 가수 이장희였다.

대마초 파동 이후 의류사업가로 절치부심하던 그는 가수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탄생시켰다. 미8군 시절 흑인병사들의 슈퍼스타로 군림했던 정예 멤버들은 통기타 풍의 ‘한동안 뜸했었지’를 펑키 리듬으로 편곡해 자신들의 음악색채로 재탄생시켰다. 리드기타 겸 보컬 최이철과 작년에 간경화로 사망한 키보드와 편곡을 맡았던 김명곤이 핵심이었다.

1952년생인 리더 최이철의 음악적 재능은 타고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평북 신의주의 전통있는 음악 집안. 아버지 최경용은 미 8군에서 재즈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다 수원고 음악교사를 했고 어머니는 미8군 가수 출신으로 홍콩에서 탭 댄서로 유명했던 이계원씨이었다.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이는 서울 보광동 집에 함께 살았던 트럼펫 연주자인 작은아버지 최상용씨. “할아버지의 풍금 솜씨도 대단했지만 집안에는 늘 재즈음악이 흘렀다. 4~5세 때 항상 듣던 재즈음악을 트럼펫으로 불기도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함께 지낸 그는 17세 때 허경 등 친구 4명과 밴드를 결성해 1969년 고병희(태양음반 대표)씨의 주선으로 미8군 프로덕션 유니버샬에 소속돼 미 8군 무대에 섰다.

데니스 분장으로 패키지 쇼를 했던 1시간 짜리 ‘데니스 쇼’가 그들의 첫 무대였다. 6개월 후 화양으로 전속을 옮겨 당시 천재소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박활란 쇼’의 백 밴드로 들어갔다.

음악 신동으로 AFKN 방송에도 출연했던 최이철은 미8군 시절 웨스 몽고메리의 음악에 빠져 펑키 리듬을 접했다.

그 후 칙 코리아, AWB 등의 음악에 충격을 받고 펑키 리듬 추종자가 됐다. 1년 간의 미8군 생활 후 부산 등 지방 무대에 섰던 최이철은 “음악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에 신중현의 음악 스승인 이교숙에게 화성학을 배우고 이판근에게 재즈의 기본을 배웠다.

1970년 미 8군을 나온 그는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 닐바나 등 수많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중 재즈 드러머 김대환의 주선으로 6인조 ‘아이들(IDOL)’을 결성해 첫 음반 ‘성음-DG가30.71년2월’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창작 곡과 팝 히트곡, 사이키델릭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실려 있지만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사료적 가치가 더 빛난다. 첫 음반 발표 후 최이철은 김대환, 조용필과 함께 1971년 ‘김트리오’를 결성해 프린스 호텔과 제일백화점 뒤 명동의 홍콩 라이브홀을 주무대로 5분의4 박자의 고난도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다양한 음악을 경험했다.

그 해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보컬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이 가수왕을 수상한 뒤 솔로를 선언하자 김트리오는 해체됐고 1972년 오비스 캐빈에서 만난 오승근과 함께 5인조 그룹 ‘영 에이스’에서 상당기간 활동을 했다.

1974년에 대구에서 김명곤과 숙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클럽 무대에 서기 위해 대구에 내려갔다가 하숙집에서 당시 솔로로 활동하던 김명곤을 만난 것. 두 사람은 처음엔 서로의 음악에 관심은 가졌지만 의기투합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명곤이 신체검사에서 시력 때문에 재검 통보를 받고 돌아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두 사람은 당시 해병대를 막 제대한 드럼 김태홍, 베이스 김태옥과 함께 ‘서울나그네’를 결성, 3일간 연습한 뒤 8군 오디션에서 가까스로 D-등급을 받아 군산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미8군에서 승승장구하던 중 이남이와 이철호가 가세하며 오디션 없이도 스페셜 A 등급의 실력파 밴드로 성장했다. 이남이가 신중현과 엽전들로 자리를 옮기는 등 복잡한 멤버 이동을 거친 서울나그네는 1976년 캐롤 음반 한 장을 발표하고 최이철을 제외한 멤버들 상당수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면서 흩어졌다.

이들은 1978년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사랑과 평화를 주자”는 이남이의 제안과 이장희의 주선으로 다시 모여 ‘사랑과 평화’를 탄생시켰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11/0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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