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특수효과 전문가 강순철

진짜같은 가짜에 인생 건 '꿈돌이'

서울 구로공단내 한 빌딩의 5층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껄렁한 남학생 넷이 일렬횡대로 서서 흘겨보고 있다.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려다 다시 쳐다보니 사람이 아니다. 속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영화 ‘친구’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모형 인형들이었다.

베토벤처럼 머리가 풍성한 한 남자가 옆에 서 있다. 이번엔 인형이 아니다. 이 회사 주인이다. 특수효과 전문가 강순철(37)씨,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 ‘매직헌터’의 대표다.

강씨의 특기가 그러하듯, 이 회사에서는 TV, 영화 등에 필요한 각종 특수분장이나 소품, 무대장치 등을 비롯해 이벤트 행사장의 이색 캐릭터나 게임기까지 ‘세상에 있을 법 하지 않은 것’ 또는 ‘진짜같은 가짜’들을 수두룩 만들어낸다. 전문제작사로는 국내에선 선두주자 격이다.

강씨는 이곳에서 5명의 직원, 30여명의 프리랜서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베테랑 강씨의 작품들은 그간 알게 모르게 도처에서 관객들을 만나왔다.

MBC 미니시리즈 ‘별’, ‘거미’를 비롯해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쓰인 다양한 소품과 무대세트들, 그중 4년전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인 조리개식 무대장치도 그의 히트작중 하나다.

영화 ‘약속’, ‘링’, ‘가위’, ‘자귀모’의 제작에도 참여, ‘쉬리’에 나오는 CTX 폭탄도 매직헌터에서 탄생시킨 것이다. 요즘도 한 영화작업과 게임 캐릭터 제작에 참여, 여백 없는 스케줄에 가을도 잊고 산다.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옮겨놓는 일을 합니다. 한마디로 온갖 잡동사니를 다 만들어낸다고 보시면 됩니다.(웃음)”


온갖 잡동사니도 훌륭한 재료

영상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쓰이는 특수효과는 장비나 표현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세분된다.

석고와 몰드 작업으로 전연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특수분장, 인공 피조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도록 와이어나 리모콘으로 조종하는 에니메트로닉스, 화공재료를 이용해 자연적인 현상이나 굉음이 동반되는 폭파 장면 등을 만들어내는 화공효과, 실물을 소형모델로 축소제작함으로써 원하는 장면을 얻고 소요제작비는 줄여주는 미니어처, 실제 건물을 영상에서 지우거나 색을 입히는 등 다양한 기술로 구사되는 컴퓨터 그래픽, 그 외에도 특수소품 영상합성 등이 있다.

특수효과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아이디어다. 상상에 현실의 옷을 입힐 방법을 찾는 일이다.

원래 에니메트로닉스를 특기로 출발해 전분야를 섭렵한 강씨의 또 다른 강점도 아이디어에 있다. 간단히 분사하기만 하면 곧바로 거미줄이 만들어지는 그의 신기한 개발작 인공거미줄도 원래 알고 있던 서로 다른 성질의 약품 네가지를 이리저리 조합해 본 결과였다.

MBC 코미디대상 시상식장에서 처음 공개돼 주목을 받았던 조리개형 무대장치도 청계천의 한 고물 카메라에서 건져낸 역작이었다.

“외국 영화에서 그런 문을 보게 된 뒤 어떻게 하면 저것을 만들 수 있을까, 계속 방법을 생각했어요. 그러다 문득 비디오 카메라의 조리개 장치를 이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청계천을 찾아가 낡은 카메라 조리개 렌즈를 사들고 와서 조각조각 완전히 분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대한 크기로 똑같이 만든 뒤 결합해 작동시켰더니 기대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더군요.”

에버랜드에 설치돼 있는, 공중에서 내려오는 무대나 바닥에서 솟아나는 우주선 모양의 특수 무대도 그의 손을 거친 것이다.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유압실린더의 원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를 제작해줄 업체를 찾자 다들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업자를 구한 뒤에도 현장에서 거의 반달동안 살다시피 철야로 작업하고서야 완성했다.

제작의 어려움은 작업실에서만 끝나는 것도 아니다. 촬영 중에도 사고의 위험이 숨어있다. 특히 총을 맞거나 그로 인해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는 등의 장면은 안전장치가 필수적이다. 이런 장면들은 마그네슘을 이용한 화공효과의 하나다.

즉, 납판에 구멍을 뚫고 마그네슘을 넣은 뒤 그 위에 피주머니를 덮는 것으로 미리 연기자의 몸에 준비한다. 그리고 그 스위치를 작동시키면 마그네슘이 구멍을 통해 튀어나오면서 피주머니를 관통, 화면상으로는 총을 맞고 피를 쏟는 장면이 생생하게 연출되는 것이다. 안전장치 없이 만약 마그네슘이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연기’가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

영화 ‘약속’ 촬영 중에는 실제로 작은 ‘유혈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우 박신양이 슈가글래스로 만든 유리병을 들고 상대 배우의 머리를 치는 장면. 그런데 아무 탈이 없어야 할 상대방 배우의 머리에서 피가 나자 조감독이 급히 그를 찾았다.

강씨도 놀라 상황을 확인해보니 “수작업으로 만드는 소품들이라 병의 두께가 균일하지 않으므로 가능한 한 병의 목 부분으로 치라”고 강씨가 적어보낸 설명서를 보지않은 연출진이 현장에서 원래의 대본을 수정하면서 하필 두께가 두꺼운 병 밑바닥 부분으로 상대 연기자의 머리를 내려치도록 동작을 바꾸었다가 낭패를 본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 연기자는 삭발머리의 맨 살갗. 굳이 이런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촬영이 완전 종료되기 전까지는 어떤 의미에서도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영화 ‘토요일 오후 2시’를 찍을 때는 촬영장에서 직접 판유리를 만들었습니다. 슈가글래스라고해서 설탕을 원료로 만들어 연기자가 다치지 않도록 해주는 특수 소품인데, 미리 만들어두면 혹시 깨질까 봐 일부러 현장에서 직접 만든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 만들어 세워둔 유리가 촬영하기도 전에 그만 부지직 금이 가버린 거예요. 원래 조금만 미세하게 균형이 맞지 않아도 슈가글래스는 잘 부서지거든요. 한바탕 난리를 치르며 다시 새 것을 만드느라 진땀을 뺐는데, 곧 하기로 했던 촬영이 계속 밀리더니 결국 사흘뒤에나 겨우 촬영에 들어간거예요. 그때까지 꼬박 3일 동안 그 유리 하나 지키느라고 꼼짝없이 촬영장에 발이 묶인 채 사람들 접근을 막으며 거기서 먹고 자며 지냈어요.”


공상과학에 매료됐던 로봇소년

강씨가 이 일을 한 지는 공식적으로 약 8년. MBC 미술센터에서 근무한 뒤 4년전 현재의 회사를 만들어 독립했다.

그러나 이 길을 꿈꾼지는 훨씬 오래전부터다.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오는 흑백 디즈니 영화를 보면서 공상과학영화에 매료됐다. 특히 좋아했던 것이 로봇이었다. 직접 램프를 연결해 불이 깜빡이는 수동 로봇을 만들어본 적도 있다. 내내 로봇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명이 ‘로봇’이었다.

대학 때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도 로봇소년의 당연한 진로였다. 한편으로는 8mm 단편영화 제작에 뛰어들면서 대학 3학년 가을에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모두 털어 벼르고 별른 첫 SF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제목은 ‘내 친구 타타’로 서울 신길동의 한 폐공장을 통째로 빌려 약 4개월간 촬영을 진행했던, 자못 배포 큰 작업이었다. 석고로 본을 떠 모형을 탄생시킨 외계인에다 피아노 줄을 달아 와이어를 만드는 등 가진 실력과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작업은 너무나 신났지만 아쉽게도 제작비와 출연자 사정으로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한동안 영화판에 있었다. 선배와 함께 영화소품 제작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특수 소품에 대해 전문적 기초를 다진 것도 그곳에서였다. 그리고 또 한번 SF영화 제작에 도전했다. 역시 외계인이 등장하는 ‘텔레파시 여행’이라는 영화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한 이것은 당시 극장에 상영되기도 했다.

1994년 MBC 공채로 입사해 미술센터내 미술개발 담당자로 일했다. 말 그대로 방송 프로그램을 위한 다양한 미술적 장치를 새롭게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날마다 발명가처럼 아이디어를 짜내고, 뭔가를 분석하는 일이 일상사처럼 자리잡았다. 툭하면 밤을 새기 일쑤였다. 와중에도 특수효과에 관심을 가진 동호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왕성한 활동을 폈다.

현재 회사의 홈페이지 도메인이 된 sfxman.com도 당시 동호회 홈페이지로 출발한 것이었다. 1998년 방송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마음껏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내고 독립했다. 다들 IMF로 얼어붙어있던 시기의 대담한 출사표였다.

“원하던대로 모험도 마음껏 했지만, 한편 시행착오의 쓰라림도 없지 않았습니다. 워낙 의욕이 넘치다보니 겁없이 어떤 일이든 가리지않고 맡았습니다. 어떨 때는 보름동안 힘들게 밤새워가며 작품을 만들었는데 의뢰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마디하는 바람에 제작비를 한 푼 받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3D분야 인식, 젊은세대 외면 안타까워

보람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극장에 불이 꺼지고 관객들이 숨을 죽이며 자신의 손때 묻은 장면을 볼 때, 자신이 만들어준 작품을 보고 흡족해하는 의뢰인을 볼 때 가장 성취감을 느낀다.

끊임없는 아이디어 싸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재료와 제작여건 등 여러 면에서 아직 열악한 국내환경에서 그나마 현재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도 그간 부지런히 외국의 동향과 정보를 쫓아다닌 덕분이다. 매년 한두번씩은 외국에 나가 새로운 정보를 살핀다.

세계의 특수효과 기술력이 선보이는 IAAPA(올랜도 위락시설 박람회)와 같은 행사는 빠짐없이 살핀다. 신작 SF영화는 물론, 새로운 특수효과가 등장한 것이면 TV의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수시로 그 녹화 테이프를 입수해 확인한다. 관련 책자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챙겨둔 비디오 테이프만 약 700개.

일단 화면에서 탐나는 장면을 보고 나면 그날부터 내내 머리에 숙제처럼 담고 다니며 제작 방법을 고심한다. 요즘은 사진만 봐도 재료는 물론 방법까지 절로 떠오를 정도가 돼 있다.

“사실상 성취감도 크고, 수익성도 높은 고부가가치 분야입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워낙 먼지나고 힘든 일을 싫어하다 보니 관심만 있을 뿐 실제로 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또 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가도 도중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해진 해답이 없는 일이라, 스스로 막힌 답을 뚫을 힘이 없으면 계속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 겨울에는 더 신나는 사업도 시작한다. 영화배우만 영화처럼 살라는 법 있는가.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만 갇혀있던 재미있고 신기한 소품, 의상 등을 일반인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인터넷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아직은 미력하지만, 장차 세계 시장을 넘보는 한국의 젊은 특수효과맨 강씨의 야심찬 포석이다. 그의 꿈은 이루어질까. 강순철의 공상은 유효하다.

입력시간 2002/11/0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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