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다시 꾸는 악몽들

정권 말기라서 그런지 우리 사회 전체가 나사라도 빠진 듯 어수선하다. ‘3룡’이라는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후보가 전국의 표밭을 누비는 사이 상사 계급장을 단 현역 군인이 부대에서 갖고 나온 소총으로 농협을 터는가 하면 법을 수호한다는 검찰 조사실에서 살인 용의자 조모씨가 주검이 돼 실려 나왔다.

공복(公僕)이라는 공무원들은 수 만명씩 길거리로 몰려 나와 낯선 단어인 ‘투쟁’과 ‘쟁취’를 소리 높여 외쳤다.

또 정치권에서 터져 나온 국정원의 ‘족집게’ 도청설은 모든 국민에게 “어! 전화 감이 이상한데, 도청인가”라는, 오래 전에 잊혀진 도청 공포를 되살려 놓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검찰 수사관의 물고문설이다. 서울지검의 11층 특별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10월26일 사망한 조모씨의 공범 박모씨가 영장실질 심사에서 주장한 물고문설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던지는 심리적 충격이 엄청나다.

특조실의 구조가 물고문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우리 모두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악몽을 다시 꾸는 듯한 전율을 느낀 게 사실이다. 조모씨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허벅지와 무릎 부근을 집중적으로 얻어맞아 사망에 이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것으로 믿어 왔던 권력기관의 가혹 행위가 버젓이 횡행한 것은 국가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것이 폭로되고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발전단계에서 볼 때 ‘입에는 쓴 약’이 될 터이다.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자. 정권 말이 아니고 검찰 권력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면 공범으로 체포된 피의자의 입에서 ‘물고문’ 이란 단어가 나올 수 있겠는가.

검찰만이 아니다. 군에 간 젊은이들이 ‘국민의 정부’에서도 여전히 매년 300명씩 죽어가고 있으나(천주교 인권위 자료), 유족들이 그 원인을 속시원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도 군 특유의 권력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협을 턴 현역 상사와 가혹행위를 한 검찰 수사관이 곧바로 쇠고랑을 차는 모습에서 우리는 ‘권력의 밀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음을 본다.

보통 사람이 검찰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웬만한 사건이라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기자도 대학 시절 폭행사건의 참고인으로 서울의 모 지청 검사방에 딱 한번 가본 것외에 검찰청과는 인연이 없다.

그때 기억은 경찰서보다 더 살벌했던 느낌으로 남아 있다. 당시 10대 여성 피해자가 강간사건에 관해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주고 받는 대화는 마치 강간 피의자를 심문하는 것 같았다. 만약 상대가 진짜 강간 피의자라면 어땠을까? 오금이 저리는 경험을 했을 지도 모른다.

조모씨 사망 후 검찰이 ‘자해’ 운운하며 책임을 피해 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20여년 전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조모씨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해’하려고 했을까 하고.

더욱 검찰에 실망한 것은 사건 발생 나흘 뒤인 10월30일 명동의 사채업자들이 기업사냥꾼, 은행 간부들과 짜고 자본금 가장 납부 등을 통해 벤처 붐을 일으킨 ‘검은 커넥션’을 발표했을 때였다. 벤처 붐이 절정에 올랐던 2000년 초 명동 일대에 나돈 ‘~카더라’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과민한 탓인지 모르나 검찰 발표 시점이 워낙 미묘해, 위기만 닥쳐오면 ‘안보 사건’을 터뜨린 과거 군사 정권의 행태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모씨 사망 사실이 밖으로 알려진 뒤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사건에 검찰 라인이 책임을 지면 수사 실적이 현저히 떨어진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강력사건을 수사하란 말이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 반응은 그 동안 사건으로 비화만 안 되었을 뿐이지, 그 정도의 가혹 행위는 검찰청사내에 늘 있어 왔다는 자백이나 다름없다. 이 자백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검찰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호사 출신 사회평론가인 박주현씨는 최근 한국일보 시론에 게재한 ‘검찰의 자백을 듣고 싶다’에서 이렇게 썼다.

“검찰이 강력사건에서 예전의 시국 사범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압박 없이 수사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떳떳하게 폭력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라. 그리고 범죄자로부터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점을 국민에게 설득해 보라.”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2002/11/0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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