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검찰, 너 딱 걸렸어"

병풍 덮어준 검찰에 배신감, 피의자 치사사건에 연일 맹폭

정권 말은 여지없이 배반의 계절이다. 최근 연이어 나온 군 기밀의 유출, 국정원 정보 유출, 검찰의 병풍 수사 결과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럼 이럴 때 정권은 그냥 손을 놓고 당하기만 할까?

최근 민주당은 서울지검의 피의자 물고문 치사사건 의혹과 관련해 한나라당보다 더한 맹공을 퍼붓고 있다. 박종철 치사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이번 사건이 반시대적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상 여당인 민주당이 김정길 법무장관과 이명재 검찰총장의 사퇴 요구는 다소 예상을 벗어난 강공인 것도 틀림없다. 때문에 이 공세의 뒤편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두 아들 병역비리 은폐 대책회의 의혹 사건을 “증거 불충분”으로 덮어 버린 ‘배신자 검찰’에 대한 보복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다.


민주당 “법무장관 검찰총장은 사퇴하라”

11월 1일 서울지검 조사과정에서 조직폭력배이자 살인사건 피의자인 조천훈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처음 불거졌을 때 민주당의 검찰에 대한 공격은 망설임이 없었다.

정대철 선대위 위원장은 이날 아침 8시 30분에 열린 선대위 본부장단 회의에서 “물고문 의혹이 사실이라면 법무장관 등 검찰 수뇌부들을 경질 해야 한다”며 주저 없이 김 장관에 대한 ‘경질’을 거론했다.

그리고 이날 회의 결과 민주당은 김 장관 뿐 아니라 이 총장까지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고 4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두 사람에 대한 해임을 요구했다. 김 장관에게만 책임을 한정시키고 있는 한나라당과는 분명히 대비되는 결론이었다.

또 김진환 서울지검장이 3일 사의를 표명하자 이낙연 대변인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무슨 말로도 변명이 될 수 없다. 관련자와 서울지검장의 문책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민주당 공격의 목표가 서울지검장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 것이다.


“줄대기 검찰, 딱 걸렸다”

이번 민주당의 검찰에 대한 공격을 보면 민주당이 검찰에 대해 ‘딱 걸렸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당은 ‘축소 수사’라고 주장하는 병풍 사건을 이 사건과 비교하며 “정치 검찰, 줄대기 검찰”이라고 연일 몰아붙이고 있다.

민주당은 아직 물고문 의혹이 불거지기 전인 10월 29일부터 병역비리 의혹 수사를 끌어댔다. 이낙연 대변인은 “검찰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 병역비리 및 은폐 의혹 수사를 하며 한인옥씨, 정연, 수연씨를 수사하지 않았고 은폐 대책 회의 의혹이 있는 김도술씨, 한나라당 정형근, 황우려, 고흥길 의원 등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대변인은 “이 후보와 관련된 병역비리 사건에서는 조사해야 할 사람들도 조사하지 않은 검찰이 다른 사건에서는 피의자가 죽도록 조사한 것”이라며 공격했다.

신기남 선대위 정치개혁추진위 본부장도 “이는 정치권 눈치보기, 줄대기에 기강까지 해이해진 정권 말기적 현상”이라고 가세했다. 민주당은 “힘없는 피의자는 죽도록 수사하고 대통령 후보 관련 사건은 알아서 덮어주고 있다”, “특권층에는 솜방망이, 일반 피의자에게는 쇠방망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역시 10월 30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검찰의 권력누수를 직접 지적하고 나섰다. 노 후보는 “검찰은 병역비리 수사를 하다가 중간에 덮어버렸고, 구체적인 단서가 제기된 이회창 후보 비자금 문제가 걸린 기양건설에 대해서는 아예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며 “검찰의 극단적인 눈치보기”라고 주장했다.


“병풍 증거 불충분”은 이명재 총장 탓

특히 이번 민주당이 노리는 표적은 이명재 검찰총장이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기대를 걸었던 병풍 수사가 뒤집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총장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병풍 수사 초기부터 수사 팀장이었던 박영관 특수1부장검사를 집요하게 공격해댔다. 한나라당 법사위 소속 의원들은 검찰에 몰려가 수사 배당을 바꾸라고 상식을 벗어나는 압박을 가했다.

한나라당은 박 부장이 한화갑 대표와 같은 전남 신안 출신이라는 지역주의에 기댄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8월 검찰 정기 인사 직전 이해찬 의원의 “검찰의 핵심간부가 정치권에 병풍 쟁점화를 요구했었다”는 돌출 발언이 터져 나오면서 일은 결정적으로 꼬였고 박 부장의 유임 여부는 뜨거운 정치쟁점이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박 부장은 결국 유임됐다. 그러나 이 총장이 박 부장의 전보를 주장하며 김 장관과 알력을 빚었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그리고 인사 후 이 총장은 김경수 특수1부 부부장을 중심으로 수사라인을 재배치하고 박 부장을 사실상 수사에서 배제하면서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번 수사결과의 단초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민주당의 시각이다. 또 김정길 장관이 끝까지 힘을 써주지 못했다는 서운함에 민주당이 김 장관의 사퇴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란 해석도 나오고 있다.


‘DJ 600억 비자금의혹’ ‘병풍 사건’반복되는 역사

민주당이 이명재 총장에게 더욱 불신을 갖는 것은 이미 한차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 1997년 대선 정국에서 ‘DJ 비자금 사건’은 지금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검찰 줄서기’를 맛보았던 순간이었다.

97년 10월 7일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365개의 가ㆍ차명 계좌로 입금액 기준 67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주장해 촉발됐던 DJ 비자금 사건은 우세를 점하고 있던 김대중 후보에게 가장 큰 위기였다. 그러나 이때 김태정 검찰총장은 유례없는 ‘수사 유보’를 결정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런 경험은 현재 ‘병풍’수사의 결과를 보고 있는 민주당에게 더욱 ‘검찰 줄서기’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는 듯하다. 그때의 경험을 반추하며 “전남 영광 출신의 김태정이 YS에게 등을 돌렸듯 경북 영주 출신의 이명재는 DJ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현재 민주당이 과감하게 검찰을 버린 데에는 집권 5년간 검찰에 쌓인 불신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한나라당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만한 사건이 많았는데도 검찰이 어느 하나 제대로 끌을 낸 사건이 없었다는 것이다.

‘호남 검찰 공화국’이라는 비난까지 무릅쓰며 검찰 수뇌부를 호남 라인으로 메웠지만 이들은 결국 검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 민주당의 검찰에 대한 공격은 그동안 쌓인 검찰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터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주희 기자

입력시간 2002/11/08 10:46


고주희 orwel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