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낙제 국회

국민의 정부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11월 8일에 문을 닫았다. 정기국회의 회기는 12월 10일까지이지만 16대 대통령 선거를 내세워 국회 교섭단체들이 회기를 단축하기로 합의해서 32일이나 일찍 문을 닫은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고 해서 국회를 일찍 문 닫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국회가 열린다고 해서 선거를 치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선거가 있다고 해서 국회가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아예 회의에 출석하지 않거나 몸은 국회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문을 닫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국회를 선거운동의 장소로 삼아 회의만 열리면 정치공방을 일삼는 장면을 보지 않으니 국민이 속상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한 두 석을 뽑는 재·보궐선거에도 국회를 팽개치고 모든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원처럼 선거현장을 누비는 일이야 다반사였다. 그러니 국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국회가 말려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인 셈이다.

이번 정기국회를 평가한다면 몇 점이나 될까? 이번 국회의 점수는 낙제점이다. 지난날 권위주의 시절에 독재자들은 국회를 귀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국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정부의 시녀’처럼 취급했다. 이번 정기국회는 그 때 이후 최악의 국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멋대로 진행된 불량국회였다.

일단 회기 100일 가운데 정쟁으로 개점휴업했던 날까지 합쳐서 회기의 3분의 1 이상을 까먹었다. 그나마 나머지 회기도 충실하게 운영되지 않았다. 정기국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국정감사와 예산심의도 엉터리였다.

국정감사는 도대체 왜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최악이었다. 국정감사는 지난 1년 동안 정부가 나라살림살이를 제대로 했는지, 국민의 혈세인 예산을 제대로 썼는지 따져보는 자리이다.

그러나 국정감사 기간 내내 의원들은 본래 목적인 나라 살림살이는 제쳐놓고 상대 당과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에 바빴다. 근거 없는 각종 의혹과 설이 폭로되었다. 국감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과 대북 비밀송금설 등 정쟁으로 시작해서 정쟁으로 끝났다.

대선에 영향을 주는 의제를 다루지 않는 상임위는 두 세 명만 자리를 지켰고, 아예 국정감사장에 나타나지 않는 의원들도 많았다. 잠시 출석해서 질의를 하고, 질의가 끝나면 답변도 듣지 않고 나가버리는 의원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나라의 살림살이 규모를 정하는 예산심의도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꼼꼼히 심의해서 나라 살림살이를 짜임새 있게 만들고 국민 부담을 줄이는 것이 바로 예산심의의 목적이다.

그러나 오히려 국민의 부담을 늘였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예결위에서 조정했을 정도였다. 상임위의 예산심의 과정에서 증액된 액수는 무려 4조원이 넘었다. 16개 상임위 가운데 예산을 삭감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지역구 사업을 챙기거나 정당 차원의 선심성 예산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탓이다.

국회 존재의 이유라 할 입법권 행사도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현재 국회에서 다루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쓴 안건들은 매우 많다.

10월말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무려 600건이 넘는다. 깨끗한 선거를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출한 선거법 개정안 등은 정치개혁특위 위원장 자리를 다투느라 허송 세월하는 바람에 제대로 심의하지 못했다.

주5일 근무제, 공무원노동조합법, 경제특구법, 기업연금법, 집단소송제, 통합도산법, 생명윤리법 등 이해 당사자들의 대립이 첨예한 사안들이나 민생관련 법안들은 국회의 외면 속에 처리되지 못했거나 왜곡된 형태로 통과되었다.

그런가 하면 선심을 쓰기 위한 비현실적인 법안을 남발했다. 예컨대 농어민 부채에 대한 이자를 대폭 감면해주는 법안은 400만 농민의 표을 의식한 일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농어민 부채를 탕감해야 하지만, 평소에는 나 몰라라 하다가 선거 직전에 느닷없이 내세우는 것은 표심(票心)을 얻기 위한 선심성이요, 생색내기용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이익단체의 요구에 ‘표’를 의식해서 부작용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법안을 일단 발의하고 보자는 식은 더욱 문제이다. 남발되는 선심성 법안에 따른 부담은 궁극적으로 국민들이 떠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손혁재 시사평론가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입력시간 2002/11/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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