昌에 찔린 5월의 정신?

5ㆍ18 구속자회 '이회창 지지' 선언으로 관련단체 갈등

“우리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지지합니다.”

대선을 50여일 앞둔 10월 29일 광주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다름아닌 5ㆍ18 민중항쟁 구속자회가 단체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구속자회는 기자회견에서 “국민 대화합을 이루고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한나라당 이 후보를 적극 지지한다”고 천명한 뒤 오후에 서울에서 열리는 한나라당 후원회 및 대선 필승 결의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

이들의 ‘폭탄선언’은 다른 5월 단체와 관계자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5ㆍ18구속자회의 이 후보 지지선언이 자칫 ‘5월 단체’의 전체 의견으로 왜곡될 수 있는 데다 이들의 정치적 행보가 자칫 ‘5월’의 순수성과 상징성을 크게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5월 단체’의 협의체 조직인 5ㆍ18 민중항쟁 제단체협의회(오단협)는 곧바로 성명을 내고 “5월의 이름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5월 당사자의 진정한 뜻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오직 정치적 중립을 견지할 것”이라며 사태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결국 5월 단체들도 ‘맛’이 가기 시작한 것이냐”는 등 5ㆍ18기념재단와 5월 단체 사무실들로 시민들의 항의성 전화가 하루 종일 빗발쳤다.

5월 단체의 한 관계자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라며 “이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 지 정말 난감하다”고 털어놓았다.


수면위로 떠오른 갈등

실제로 5ㆍ18 관련단체들이 받은 충격은 예상보다 컸고, 이는 곧바로 구속자회에 대한 성격 규정문제로 이어지면서 오단협과 구속자회간 잠복해 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불거졌다.

오단협 이경희 간사는 “이 후보 지지선언을 한 구속자회는 과거 5ㆍ18구속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일부 회원들의 모임으로 ‘정통’으로 볼 수 없다”며 “단순한 계 모임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쏘아 붙였다.

사실 5월 단체가 구속자회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는 소문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현재 5ㆍ18구속자회는 이 후보 지지선언을 발표한 황창옥(44) 이사장 계열?구속자회와 오단협 소속의 구속자회 등 2개의 단체가 같은 이름을 내걸고 서로가 적자임을 주장해 맞서고 있는 상태이다.

이처럼 구속자회가 양분된 것은 2000년 5월 5ㆍ18 피해자 조작 보상금 사기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5ㆍ18 관련 여부 심사위원이자 구속자회 회장이었던 이모(45)씨가 서류를 허위로 꾸며 5ㆍ18 보상금을 타도록 도와준 대가로 1억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되면서 자성론과 함께 5ㆍ18구속자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 것.

하지만 정작 비대위의 정상화 노력과는 달리 이 전 회장측과 5ㆍ18 제 단체협의회로 통합하려는 측과의 힘 겨루기 양상이 빚어지면서 갈등상태가 지속됐다. 특히 올해 초 석방된 이 전 회장이 조직 정비를 시도, 4, 5월 정기총회와 이사회를 잇따라 개최, 신임 이사장 선출과 함께 법원 등기를 마치고 이사진을 새로 구성했다.

오단협 소속 구속자회는 그러나 이 전 회장 등이 회원들(3분의 2 이상)의 동의도 없이 총회를 임의대로 치른 데다 인장을 도용해 이사진을 교체했다며 광주지법에 ‘총회 원인무효소송’과 ‘업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법적 소송으로까지 비화했다.

이 때문에 오단협과 5ㆍ18기념재단측은 황 이사장 계열의 구속자회에 대해 각종 지원금 지급 거부는 물론 5월 관련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황 이사장은 “회원 수가 694명으로 행자부의 정식 허가를 받은 엄연한 사단법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ㆍ18 단체 주변에서는 황 이사장측 회원이 3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5ㆍ18기념재단 관계자는 “이들 구속자회는 가짜 5ㆍ18보상금 사기사건 이후 도덕성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이 전 회장측 회원들이 일부 세력을 규합해 떨어져 나간 것”이라며 “5ㆍ18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5ㆍ18 팔아먹는 언론플레이” 비난

기념재단의 또 다른 관계자도 “그들은 ‘5ㆍ18’을 내세워 행정기관을 찾아 다니면서 각종 청탁과 이권에 개입하는 등 5월 정신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라며 “언론 플레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힐난했다.

이 후보 지지선언으로 가장 5월 단체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5ㆍ18’이 또 다시 정치바람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오단협은 한나라당과 황 이사장측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5월 단체들도 이를 수긍하는 분위기다.

오단협 김후식 의장은 “1, 2개월 전부터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도와달라’며 구속자회 등에 접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치권에서 5ㆍ18을 정쟁의 도구로 이용해 온 것에 대해 참담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 이사장측은 “어불성설”이라고 펄쩍 뛰고 있다. “광주에서 그랬다가는 돌을 맞는다”며 운을 뗀 그는 “이미 1997년 10월 국민통합선언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조건 없이 용서했다. 이 후보 지지선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영ㆍ호남 화합차원에 이루어진 것이지 다른 의도는 절대 없다”고 순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회원 수도 적고 5월 관련 단체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가 미는 사람(이 후보)이 (당선)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흥분했다.

이 같은 5월 단체간 해묵은 앙금과 이 후보 지지선언에 대한 공방이 이어지면서 광주 시민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며 크게 분노하고 있다.

참여자치 21 박광우 사무처장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뻥튀기 하거나 정쟁으로 비화시키는 데 재주가 뛰어난 정치권에 의해 ‘5ㆍ18’이 또 다시 이용되면서 ‘오월정신’이 멍들고 있다”며 “정치권이나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5월 단체 모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원 박시용(33)씨는 “5월 단체의 정서가 이 후보 지지로 나타난다고 믿는 광주 시민들은 없겠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데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나라당이 일과성이 지나지 않은 해프닝을 두고 ‘역사적 사건’이라며 떠들어대는 데 대해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5ㆍ18구속자회의 이 후보 지지선언은 ‘해프닝’이다”는 박씨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아직 광주와 이 후보간의 정서적 교감은 시기상조인 상태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생긴 5월 단체간의 갈등과 그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는 않을 전망이다.

광주=안경호 기자

입력시간 2002/11/08 11:44


광주=안경호 kh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