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출하는 2002 성담론] 대한민국은 지금 섹스를 말한다

문화적 코드로 굳건히 자리잡은 性

민우(가명)는 중3 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그마한 사업체의 사장인 아버지가 모범생인 그에게 그렇게 졸랐던 고급 기종의 컴퓨터를 한 대 사 준 날 밤이었다. 자정이 넘었지만 아들의 방엔 불이 켜져 있다. 이날 아버지는 예전에 없이 과일까지 손수 깎아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들어온 것도 모를 만큼 모니터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나 화면으로 눈을 돌린 순간, 아버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너댓명의 남녀가 온갖 동작으로 난교를 펼치고 있었다. 그날 밤새도록 아버지는 울었고, 다음날 아침 자신과 똑 같이 눈이 통통 부은 민우와 만났다.

민우 부자는 이제 겨우 하나의 ‘성인식’을 치른 것이다. 도처에 깔린 것이 섹스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인터넷 강국이란 명성에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섹스의 광장이 공존한다.

음란 사이트 접근 차단 프로그램을 개발한 인터넷 관련 업체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섹스 관련 도메인이 11만 5,423개다. 한국성과학 연구소가 인터넷 이용 중2~고3 학생 1,0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포르노 정보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학생은 전체의 77.1%로 드러났다.

중고생들의 채팅 문화는 이른바 ‘컴섹’으로 도배된 지 오래다. 예를 들어 ‘섹스 코리아’ 도메인 하나에만 들어가도 몰카 동영상, 섹시 갤러리, 일본 야한 동영상, 연예인 핫 동영상 등을 무제한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영화 ‘죽어도 좋아’가 노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리비도의 세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면, 그 대극에 서는 것이 11월 6일 개봉하는 영화 ‘몽정기’. 예쁜 교생 선생님의 팬티를 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는 1980년대 고교생들의 성 이야기다.

영화 ‘친구’를 뺨치는 야한 대사는 우리 시대의 섹스가 어느 정도로 공개돼 있는 지를 증명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남자의 육체도 섹스의 상징이 된다는 것을 입증한 가수 박진영의 노래 ‘섹스 게임’에 열광하는 것은 ‘말만한’ 처녀들이다. 사실 박진영의 동작 하나 하나는 노골적으로 섹스를 암시한다.


사회적 억압에서 해방된 여자의 성

2002년 11월. 한국 땅은 분출하는 성담론으로 질펀하다.

초순부터 극장가에는 ‘밀애’와 ‘중독’ 등 남녀 관계를 테마로 한 영화가 화제다. 8일 개봉되는 ‘밀애(密愛)’는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을 영화화한 것.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신경 쇠약에 걸린 30대 초반의 미흔이가 병을 고치러 찾은 의사와 벌이는 위험한 ‘게임’이 중심이다. 4개월 동안 데이트 하며 섹스도 즐기지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면 지는 게임이다.

여기서 남편의 바람에 극심한 충격을 받아 맞바람 피우는 30대 여인으로 나오는 김윤진이 첫 공개할 나체 신이 벌써부터 화제다. 미흔의 혼외 정사가 결국 여성도 성적 희열을 맛볼 권리가 있다는 것과,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사실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11월 11일 발매될 발라드 편집 앨범 ‘일탈을 꿈꾸며’도 이에 못지 않는 화제를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가요 앨범이지만 무게 중심은 노래보다 일기 형식으로 씌어진 고백담에 가 있다. 결혼 4년 만에 찾아 온 권태에 10년 전 애인을 찾아 가는 32세 여인의 이야기다.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카페에서, 차 안에서, 모텔에서 만난 그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으며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는 섹스를 기록한 일지이다. 갖가지 상황에서 벌어지는 섹스가 묘사된다.


섹팅ㆍ방팅ㆍ묻지마 MT

‘순결’은 시효가 만료됐나. 민우의 뒤를 밟아 보자.

마음을 잡고 공부에 열중한 덕택에 명문대에 들어 간 민우에게 또 다른 현실이 닥친다. ‘과 커플’, ‘캠퍼스 커플’이란 말에서 풍기던 풋풋한 낭만은 대학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 대학교에서 ‘공인된’ 커플이라면 MT 가서 따로 방을 잡아 밤을 보내고 다음날 과우들과 합류해 일정을 마친다. 학습 사이트와 포르노 사이트를 번갈아 보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섹팅(섹스를 전제로 한 미팅)‘, ‘방팅(방과 방끼리의 미팅)’, ‘묻지마 MT’는 차라리 자연스런 수순일 지도 모른다.

이들은 방세, 생활비, 유흥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동거가 갖는 최대의 현실적 매력으로 당당히 꼽는다. 식사 준비와 설거지, 빨래, 청소 등을 번갈아 하되 상대의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 생활 방식이다.

물론 섹스도 피임을 조건으로 OK다. “피임만 하면 섹스가 어때?” 얼마 전 알게 된 여자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민우도 우리 시대 ‘보통 대학생’이 된 것일까.

4월 1일자 고대신문은 같은 학교 학생 26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 결과를 발표했는데, ‘동거 경험이 있다’는 학생이 4.6%였다. 동거에 찬성하는 학생이 74.1%로, 특히 ‘결혼 전에 꼭 동거 생활을 해보겠다’는 학생은 5.7%로 드러났다.

2001년 경북대 신문방송학과가 대구 지역 4개 대학생 420명을 상대로 벌인 성의식 리서치 결과를 이어 받는 수치다. 당시 혼전 성관계가 절대 불가하다고 응답한 학생은 11.8%였다. 비교적 보수적인 경북에서도 대학생의 9할은 혼전 섹스를 긍정한 것이다.

현재 가입 회원이 5만명을 넘어선 동거 사이트 ‘아이 러브 동거(http://ilovedonger.co.kr)’는 국내 처음으로 동거 생활의 동영상까지 공개했다. 정회원에게만 공개한다는 전제로 이 사이트는 동거 첫날 밤, 아름다운 성관계 등의 제목으로 동거의 실상을 보여 준다. 이 사이트는 11월 이름을 ‘비다 노블레(www.vida.co.kr)’로 개칭하고 회원 실명인증제를 실시, 동거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 주고 있다.


성문화의 자연스런 확산

피임에 관한 한 ‘순결’의 민우는 철저하다. 그의 또래들에게 ‘혼전 순결’이란 성 관계의 유무가 아니라, 낙태의 여부일 정도로 그들은 철저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자타가 페미니스트로 인정하는 민우의 생각은 좀 다르다. ‘내 여자 친구에게 낙태 수술의 고통은 지우지 말자’는 마음이다. 명품을 위해 원조교제도 마다 않는 여대생들이 활보하는 세상인데, 그런 것 않고 자신과의 관계에 충실한 그녀를 사랑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서울 시내 P공원 옆에 볼일이 있어 간 민우. 그는 안다.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는 영감님들 옆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주머니들의 정체를. 섹스의 혁명, 비아그라 덕택에 노인도 언제든 ‘세울’ 수 있는 세상이다.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될까?’

‘외로운 노년을 견디다 못한 73세 노인(박치규)이 홀로 사는 또래의 노파(이순례)와 즐겁게 살 수 있는 데에는 그 약도 한몫 톡톡히 할 지 모르지’. ‘죽어도 좋아’의 선전 포스터를 물끄러미 보며 민우는 잠시 생각해 본다.

2002년 늦가을의 한국, 섹스의 봇물은 전방위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1/08 12:3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