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출하는 2002 성담론] 노인들은 갈망한다, 사랑과 섹스를…

사회적 편견에 묻힌 실버세대의 성

“성(性)욕을 표현하는 노인을 ‘응큼’하거나 ‘부도덕’하다고 몰아붙이지 말라. 성생활과 노인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노인에 대한 ‘성학대’야!”

노인의 ‘성(性)’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70대 노인들의 성과 사랑을 그린 박진표 감독의 영화 ‘죽어도 좋아’의 상영 문제를 놓고 격론이 일어나면서, 노년의 성에 대한 논의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노인’과 ‘성’은 우리 사회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개의 두 단어였다. “노인들은 성에는 무관심하고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점차 노년의 성에 대한 견고한 편견은 깨지고 있다. 성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의학이 발달하고, 사회 분위기가 개방화되면서 노인들의 성문화도 급변하고 있다. 우리의 실버 세대는 성을 멀리하기엔 너무 젊은 육체와 정신을 갖고 있다.


노년의 성, 음지에서 양지로

음지에 묻혀 있던 노인의 ‘성’이 부각되고 있다. 노인들에게 성생활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보편적이다.

계명대와 대구 달서구 신당종합사회복지관이 최근 60, 70대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노인의 51%가 지속적인 성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배우자가 없는 노인도 9%가 음성적인 방법으로 성생활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노년기 성생활에 대한 의식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배우자가 있는 노인의 58%, 배우자가 없는 노인의 30%가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건강에 도움이 돼서(38%), 또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어서(12%) 등이 주요한 이유다.

서울의 한 노인복지센터에 열심히 다니는 최모(68) 할머니는 “70세가 넘으면 성감이 없어진다고 여기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최 할머니와 사귀고 있는 김모(72) 할아버지는 “노인들이 만남의 자리에 나오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과 무관하지 않다. 사랑을 말하면서 성을 빼고 얘기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이신영 계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들의 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들이 성적 욕구를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황혼의 사랑 식히는 싸늘한 시선

황혼의 사랑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노인들을 옭아맨다. 늘그막에 찾아온 사랑은 지키려는 노인들은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에 시달려야 한다.

40대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쓸쓸히 여생을 보내던 A(70) 할머니는 올 3월 N실버타운에서 B(74) 할아버지를 알게 됐다. 단지 공동식당에서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마음이 끌려 친구로 시작된 만남을 자연스럽게 교제로 이어갔다.

그러나 교제가 한 달은 넘어선 4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면서 주변의 따가운 ‘눈총’이 시작됐다. “즉시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나가달라”는 다른 입주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A할머니는 “겨우 한 달을 만났을 뿐인데 무슨 결혼이냐”고 펄쩍 뛰었지만, 반상회 자리에서 “두 사람이 같이 밤을 보냈다”는 말까지 나돌면서 결국 실버타운을 떠났다. B할아버지도 “혼자 남아 있으면 뭐하냐”며 거처를 옮겼다.

A할머니는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애들 다 키우고 남편과 사별한 뒤 허무한 마음이 들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생활하는 것이 좋았다”며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 젊었을 때처럼 건전하게 이성교제를 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했다.

유료 양료 서비스시설에 만난 또 다른 70대 노인 커플의 사정은 더욱 특별하다. 오래 전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동고동락해온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늙어서 불륜이 웬 말이냐”는 자책감에 고통스러웠지만, 야반도주를 감행하며 사랑을 선택했다. 혼자 남겨진 할아버지의 부인은 할 수 없이 다시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 됐다.

최근 ‘사랑’을 찾으려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아직 노년층의 사랑을 ‘주책’이나 ‘노망’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그런 만큼 노인들의 사랑에 대한 갈망은 더 애틋하다. 최근 실버타운 등지에서 독립적으로 사는 노년층이 증가하고, 노인대학 등 자연스럽게 이성을 접할 기회가 생겨나면서 노인들의 이성교제도 활발해지고 있다.

임춘식 한국노인복지학회 회장은 “노년의 사랑을 무조건 일탈적으로 치부하는 시각을 고쳐야 한다”며 “노년기를 소외의 시기가 아닌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성숙한 시기로 준비할 수 있도록 차세대 노인을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올바른 노년기의 사랑과 성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독 달래줄 이성 교제

고독과 소외감은 노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가장 큰 아픔이다. 이러한 쓸쓸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이성과의 교제가 무엇보다 효과적인 위로가 된다.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면 외로움이 엄습해와요. 혼자 늙어가는 외로움은 자식이나 친구도 달래줄 수 없어요.” “날씨가 추워지면서 옆구리가 더 시려요. 젊은이나 노인이나 이성에 대한 감정은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최근 ‘노인의 전화’에 걸려오는 상담 내용들이다. 올들어 상담건수 중 전체의 17%가 이성문제와 관련한 내용이다. 전화를 걸어오는 연령대도 남자는 80대, 여자는 70대까지 올라가고 있다.

강병만(73) 노인의 전화 사무국장은 “경제적ㆍ심리적ㆍ신체적 학대만이 노인 학대가 아니다”며 “노인의 건강한 이성교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사이버 공간에서도 노인들의 이성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런 본성으로 해석하고 커뮤니티 공간을 마련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노인정보 전문 포털인 실버클럽(www.silverclub)은 ‘이성동호회’란 만남의 장을 주선하고 있다.

스위트케어닷컴(www.sweetcare.com)에서 운영하는 ‘신노인문화’에서는 노년기의 이성교제와 계약동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글을 올려 많은 노인들의 박수를 받았다.

실버월드(www.silverworld)의 ‘실버언론’에서도 노인들의 당당한 이성교제를 권장한다. 노인들의 이성 교제를 백안시하는 사회분위기를 바꿔 실버세대도 적극적인 만남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밖에도 실버빌(www.silverville.co.kr), 웰에이징닷컴(www.wellageing.com), 노인건강정보사이트(medcity.com/noin.html) 등 다른 노인 사이트들도 앞다퉈 ‘로맨스 그레이(romance gray)’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효자보다는 악처를 원한다

실버동거와 재혼은 노년기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탈출구다. “제 아무리 이름난 효자라도 악처보다 못하다”라는 옛말이 있다. 홀로된 노인에게 재혼은 잃어버린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92년 1,438건이던 60세 이상 남자의 재혼건수가 97년에는 1,535건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2,343건으로 급증했다. 60세 이상 여자의 재혼건수도 643건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노년기의 재혼은 아직도 가시밭길이다. 이혼율의 증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늘어난 재혼율의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홀로된 노인이 밖에서 이성친구를 사귄다고 하면 자식들마저 ‘망신스럽다’며 펄쩍 뛰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족간의 재산이나 상속에 대한 갈등 등도 노인들의 재혼을 주춤하게 만든다.

신모(73) 할아버지는 올해 7월 60대 할머니와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다 며느리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기도 했다. 노인의 전화의 강 국장은 “홀로된 부모의 편안한 노후생활을 하나의 대안으로 실버동거와 재혼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개방적 시각 가져야

얼마 전부터 서울 황학동 도깨비 시장은 영화 ‘죽어도 좋아’의 노인들처럼 적극적인 섹스를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노인들로 붐비고 있다. 섹스 보조기구, 알약, 링, 젤리, 비디오테이프 등 모형 성기가 길거리에서 버젓이 팔린다. 주 고객은 최소한 60세는 넘어보이는 노년층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일부 노인관련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여전히 우리사회에서는 노년기의 원숙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경향이 높은 까닭이다. 또한 사랑과 섹스에서 소외된 노인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상기시킬 수 있다는 견해다.

그럼에도 노인의 성과 사랑에 대해 개방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김태현 성신여대 생활과학대학 교수는 “그 동안 가려졌던 노년기 사랑과 성생활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노인복지를 향상시키는 의미 있는 첫 행보”라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2/11/08 12:47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