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망령 되살아 날라"

정몽준 대선출마로 정치권 '현대 때리기'집중, 현대家 전전긍긍

지난 8월 정몽준 의원의 인기가 치솟자 한 재계 인사는 “현대가 걱정이다”는 말을 남겼다. 정 의원이야 정치인이니 대선에 출마하는 것이 자연스런 행보이겠지만, 그 여파가 현대에 고스란히 몰려올 것이란 우려였다.

2개월여가 지난 지금 현대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차 그룹의 소 그룹으로 쪼개진 현대가(家)는 10년 전의 정치망령이 되살아난 모습이다.

‘현대’이름이 포함된 새로운 의혹들이 나돌고, 또 정치권의 폭로가 잇따르면서 현대가는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르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북 치듯 하는 ‘현대 때리기’는 12월 대선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이때문에 현대는 당분간 산 넘어 산을 가야 할 처지가 돼 있다.


정치권과 거리두기 안간힘

현대가의 3개 그룹이 ‘정치 바람’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제 각각이다.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이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하는 정몽준 벗기기에 시달리고 있지만, 현대차 그룹은 의혹의 사정권에서 떨어져 있어 지금까지 바람막기는 가장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차 그룹은 중국과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세계박람회 유치에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계열사 경영진이 모두 동원돼 있어 정치바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정 회장은 7월부터 동생 정몽준 의원의 대선출마에 따른 구설을 피하려고 언론과의 접촉을 끊어 왔다.

파리 자동차 박람회에 기자단을 이끌고 참석하려던 계획도 같은 이유로 무산시켰다. 정치권으로선 현대차를 공격해 대외신뢰도에 흠집을 내고, 박람회 유치 실패의 빌미를 주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 되도록 현대차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대중공업과 현대그룹은 가능하면 정치와 연루되지 않길 바라지만, 마땅히 취할 조치가 없는 상황이다.

현대그룹은 그 나름대로 대북사업으로 방어벽을 치려 하고 있으나 쉽지는 않아 보인다. 추진하거나 예정된 대북사업은 금강산사업과 개성공단인데, 현대가 독점적 사업권을 확보한 두 사업은 조만간 북측이 특구로 지정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계는 현대가 대북사업을 현 정권에 이어 차기 정권에서도 이끌어가기 위해 이들 사업을 이른 시일내에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는 관측을 하고 있다.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정권교체 시 자칫 지금까지의 사업마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북지원 의혹, MH 경영복귀도 불투명

특히 정치권이 제기하는 대북비리 의혹의 중심에 현대그룹이 서 있어, 일부에선 잘못될 경우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현대아산 정몽헌 이사회 의장이 미국에 장기 체류하는 것에 대해 비록 해석이 구구하지만 그룹측은 외자유치를 위해 뛰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 같은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 의장 자신, 또 그룹차원에서 생존을 위해 북한을 매개로 한 방어벽 쌓기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잘못되면 정 의장 등 경영진에 대한 책임 추궁과 맞물려 계열사들이 어떤 위기로 치달을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존 게임일 수밖에 없다.

사실 현대건설이 채권단에 넘어간 현대그룹은 가까스로 그룹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금융부문의 현대투신과 현대증권 등의 처리는 아직 매듭을 짓지 못했고, 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은 갈수록 의혹이 커지는 대북 지원설에 휩싸여 있다.

또 오너인 정 의장은 현대상선의 자동차선 매각 성사 이후 순조로운 복귀 시나리오를 짜왔으나, 현재로선 정치권과의 ‘빅딜’없이는 경영복귀가 물 건너 간 상황이다.

그러나 정 의장은 개성공단 개발을 위한 외자유치에 어느 정도 근접한 성과를 올렸으나, 북한 핵 문제와 북미관계 등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게 주변 인사의 전언이다.

1992년 대선 이후 현대그룹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혹독한 세무조사와 금융제재, 경영진 사법처리 등으로 현대 계열사중 일부는 휴ㆍ폐업설에 시달려야 했다. 현대는 결국 재계 1위 자리를 삼성에 내주며, 큰 후유증을 앓아야 했지만, 이것도 현대나 되니까 견뎌냈지 다른 기업이었다면 벌써 ‘두 손 들었을 것’이란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익치 폭로’로 태풍 앞에 선 MJ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 송금설과 현대전자(지금 하이닉스반도체)의 1억 달러 유출설 등이 현대그룹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몰고 온 ‘주풍’(株風)은 현대중공업그룹을 정치 태풍권으로 끌어냈다.

이 전 회장이 추가폭로를 예고하면서 현대중공업은 현대그룹의 소극적 대응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현대를 부실로 몰고 간 장본인이 바로 이 전 회장이란 것이다.

현대그룹이 부실로 간 3대 계기인 1996년 국민투신 인수 당시에는 그룹 금융부문을 지휘했고, LG반도체 인수 때는 그룹 운영 위원이었으며, 금강산사업 등 대북사업까지 주도했다는 ‘장본인’이라는 이유에서다.

현대가 주변에는 ‘주인을 몰라보는 머슴’격으로 이 전회장을 비하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사실 현대전자 주가 조작에 동원된 중공업 자금이 이동하는 과정에 정 의원이 개입할 수 있는 정황은 충분하지만 사법적 처리가 끝난 상황이고, 또 선거를 앞둔 미묘한 시점에서 이 전 회장의 ‘폭로’저의가 오히려 불순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은 셈이다.

그래서 현대가에선 이 전 회장이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정몽준 의원을 끌어들인 배경에는 사감(私感)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전 회장이 현대중공업과 정 후보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연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하이닉스 외자유치 때의 각서와 소송건이다. 1997년 하이닉스 외자유치 때 현대중공업이 지급보증을 꺼리자 이 전 회장은 만약의 경우 현대증권이 손해를 보전해주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다.

그러나 외자유치 건이 결국 ‘만약의 경우’가 그대로 연출되면서 현대중공업은 각서를 근거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해 1심에서 1,718억원 지급 판결을 받아 일부 승소했다.

그러나 반환액수가 요구액의 70%에 불과하고, 이 전 회장의 책임이 인정되지 않자 중공업은 항소했고, 이 재판은 2심이 진행되고 있다.

한때 재산이 100억원 대로 알려진 이 회장은 “재산이 1억원 밖에 없으니 다 가져가라”며 중공업측에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등 현대증권 회장직을 내놓은 이후 미국에 체류하며 정 의원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측근들에게 수 차례 표출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태규 기자

입력시간 2002/11/08 13:17


이태규 t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