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고우영

내 만화 한컷 한컷은 피와 살의 기록

널찍한 책상에 앉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쓱싹쓱싹 그려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모습, 미염공 관우와 두주불사의 호걸 장비가 재림한다. 둘 사이, 그들을 탄생시킨 고우영이 서 있는 매무새가 왠지 어줍잖다.

펜을 쥔 손놀림은 여전히 날렵하지만, 만화가 고우영(63)의 얼굴에는 주름이 제법 앉았다. 어찌 세월 탓 뿐일까. 배 한 가운데로 지퍼 자국을 가리켜 ‘40㎝ 대장 탈출구’라 써 놓고는 자신의 선한 눈매를 꼭 닮은 유비를 바로 옆에 그려 넣어 그림을 완성한다.

2002년도 버전 도원결의의 현장이 10월 30일 일산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재현됐다. 마치 자기 만화의 한 컷인 양, 그는 방금 언론에 대수술이 남긴 흔적을 가장 그 다운 방식으로 첫 공개한 것이다.


한자 만화 창작에 몰두할 계획

“사나이는 몸이 아미 플랙(Army Flagㆍ군대 깃발)이죠.” 소년 시절 장난 치다 오른 무릎을 크게 다쳐 받은 수술 자국도 내친김에 보여 준다. 바로 그 증언자의 의지와 그것을 초탈해 내는 골계의 힘으로 그는 험악한 시간들을 헤쳐 왔고 동시대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만화쟁이는 모든 걸 똑똑히 봐 둬야 해요.” 23살 그렸던 첫 만화 ‘쥐돌이’에서의 염하는 장면도 부친의 염습 광경을 똑똑히 지켜 봐 두었기 때문에 생생히 그릴 수 있었다.

‘삼국지’에서 관우의 염습 대목이 독자의 뇌리를 자극하는 것 역시 그 덕택이다. 항문을 자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터에, 절제된 대장을 달라고 했다가 의료진에게 핀잔만 들었다는 고우영의 만화 한 컷 한 컷은 피와 살의 기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만화 그리기란 철저한 개인 작업이다.

풍경 등 곁다리 그림은 이른바 문하생들에게 맡기기 일쑤인 요즘 기업형 ‘만화 생산’ 방식을 철저히 거부한다.

8월 10일 척추속으로 길이 20㎝의 가느다란 관이 삽입돼 마취약이 투입되는 수술대 위에서도 그는 눈을 뜨고 보려 애썼다. 내시경과 각종 조명 기구 등 낯선 수술실 풍경을 머릿속에 담아 두려는 이 예사롭지 않은 환자를 보는 간호사의 마음이 오히려 다급했을 정도다.

“이번 수술 때는 둘까지 밖에 못 셌어요.” 아직도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 8시간 걸리는 엄청난 수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수술 전 신부에게 종부성사까지 부탁해 둔 사람 같지 않다.

아버지의 대수술 소식을 듣고 모처럼 가족이 모였다. 미국 뉴욕과 플로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식들을 오랜만에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회복 기간 보름 동안 아들과 모처럼 바둑도 두고, 행복했죠.” 그를 두고 망중한이라 하는 걸까.

“죽었더라면 못 하는 것 아니겠어요?” 삶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다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예전의 화색이 돈다. 김용옥 등 동양학의 대가를 찾아 자문을 구해, 요즘 세대가 웃어가며 한자를 배울 수 있는 만화책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할 생각이다. 이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그는 곧 인근에 오피스텔을 얻어 출퇴근해, 초ㆍ중ㆍ고ㆍ대학생 등 4부작으로 구상하고 있다.

그보다 수술 때문에 중단됐던 장편 만화 ‘삼국지’의 복원 작업이 더 급하다. 1978년 일간스포츠에 연재됐던 ‘삼국지’는 그러잖아도 스포츠 신문 독점 시대를 누리고 있던 그 신문의 입지를 더 확고히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치욕의 시간을 안겨 주었다. 사전과 사후 심의제로 검열 만능주의를 구가하고 있던 당시, 조금이라도 잔인한 장면이나 선정적인 장면은 가차없이 고쳐야 했다. 하필이면 10월 25일이었다, 방통이 죽는 장면을 봉황새 추락하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당시 그리면서도 ‘이거 대통령 기장인데…’하는 께름칙한 마음이 가시지 않더니 바로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것이다. 이미 신문에 난 것도 다시 심의하던 당시, 당국은 원본을 입수해 가위질 하는 것으로 심통을 채웠다.


권력의 폭거에 분개하던 시절

‘일지매’ 연재 당시의 일도 기가 찰 노릇이다. 조선 팔도 사투리가 흐드러졌던 이 만화는 ‘방언 불가 심의 규정’이라는 해괴한 법에 저촉됐다. 군대 폭력이나 왕실 비방하는 장면도 성적 표현과 싸그리 걸려 제지당했다.

또 ‘수호지’의 경우는 송나라의 학정에 반발하는 양산박 장정들이 불온한 저항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관군이 뇌물에 매수되는 대목이 국가의 권위를 실추시킨다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 했다. “x 떼고 불알 떼고 되는 게 있나”며 작가는 아직도 흥분을 감추지 못 한다.

당시 그는 모든 원고를 불지르려 했으나 식구들이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삭히고 말았다. 간곡한 만류로 살아 있던 그 대작들은 이제 모두 못 다한 꿈을 활짝 피울 태세다.

문학동네 산하 ‘애니 북스’가 그에게 출판을 제의해 온 것이다. 지난해 ‘삼국지’가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에 무삭제로 연재돼 네티즌들의 폭발적 호응을 받은 터라 대중성은 확실히 검증받은 터다. “24년 동안 앵벌이 노릇 시켜 온 내 자식을 되찾는 심정”이라고 그는 말한다.

1980년 ‘주간한국’에 연재했던 세태 만화 ‘상가 이야기’도 계염군의 사전 검열에 걸렸다. 고속도로가 들어설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해 거액을 챙긴 졸부 이야기였다.

“다 들어 내고 다시 메꾸느라 혼쭐났죠.” 어린이의 전유물이었던 만화가 성인의 읽을거리로 탄생한 시간의 뒤안길에는 국내 성인 장편 극화의 개척자로서 그가 치러야 했던 험난한 사건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만화가들을 x 같이 봤던 거죠.“

맏딸이 고등학생이던 1970년대 그는 딸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들어야 했다. “니네 아버지는 야한 그림만 그린다고 친구가 놀리더라죠.”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그는 가슴이 아리다. 스포츠지에 기고하던 당시 믿지 못할 정도의 박봉에 만족해야 했던 현실조차 그 일에 비하면 약과다.

‘주간한국’에 연재하던 시절은 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매체에 한꺼번에 기고하던 때였다. 주간여성(‘꽃전설’), 주간중앙(‘배비장전’) 등 주간지는 물론, ‘여원’과 ‘주부생활’ 등 7개의 매체가 그의 마감 시간에 목을 뺐다.

당시는 만화 기고밖에도 동양라디오의 일일 어린이 드라마 ‘소년극장’과 TBC-TV의 음악 프로 시나리오까지 맡았으니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던 시절이었다. 그는 “하루에 네 시간 잤고, 담배 세 갑을 꽁초까지 태웠다”고 기억한다. 그 폐습을 고친 것이 3기로 치닫던 결핵이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그러나 이제 조금도 외롭지 않다. 만화가 당당한 장르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2001년 10월 제 3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에서 대중예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훈장을 수여받은 일은 개인의 차원을 뛰어 넘는 경사였다.

만화에 대한 범사회적 승인에다, 두 아들을 조수로 곁에 둔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지 모른다. 첫째 고성언(34)은 뉴욕 SVA(School of Visual Atrts)에서 일러스트레이션 대학원 2년 과정을 마치고 25일 합류했다. 지금은 칸그리기와 배경 작업 등 수작업이나 아버지 원고를 컴퓨터화하는 등 간단한 도움을 주고 있다.

또 동생 고성일(32ㆍ중앙대 연극학과 강사)은 요즘 젊은이들의 최신 유행어 등의 싱싱한 정보를 아버지께 제공하고 있다.

2003년 2월이면 항암주사 치료 6개월이 끝난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년 3월에 술 한잔 해요”라며 벌써부터 권주가를 부른다. 요즘 한달 중 닷새 동안은 항암 주사를 맞아야 하고 그 고통에 얼마 동안은 말도 잘 못 하지만 그는 결코 ‘고우영’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만화로 한자를 배우며 킬킬 웃자는 거죠” 구상중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몸짓과 언성이 커져 간다. “확실히 끝내주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고우영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한국 사람들은 다 안다.

11월 5일 그는 집에서 걸어 15분 거리에 있는 27평짜리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아버지를 도우러 물 건너 온 아들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먼저 ‘일지매’와 ‘초한지’를 초판 그대로 완전 복원하는 일에 부자는 여념이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성서가 말했다면 고우영은 ‘웃음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으로 고독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성서 역시 그의 작업 대상이다. 명동성당 바로 옆 계성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카톨릭과의 인연이 만화와 직결됐던 것이 2000년 단행본으로 발표했던 ‘천국의 열쇠’였다.

1992년부터 3년 동안 평화신문에 ‘둥근 찌그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됐던 만화다. 간단없이 발휘되는 그의 재치가 성스러운 주제속에서 묘하게 더욱 빛나는 책이다. “기회가 닿으면 성서를 삼국지 처럼 내 스타일로 쓸 생각이에요. 성서라고 쌍말 쓰지말란 법이 있나요?”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1/0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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