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두드린 천사의 방망이

가을의 전설 쓴 애너하임 에인절스, 창단 첫 월드시리즈 쟁패

10월 20일(한국시간)부터 8일 동안 역전ㆍ재역전의 신화를 뿌리며 미국 전역은 물론 전세계 야구팬들의 가슴을 쓸어내렸던 미 프로야구 월드시리즈가 애너하임 에인절스 붉은 천사들의 잔치로 화려한 막을 내렸다.

애너하임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거인들을 시리즈전적 4승3패로 물리치고 1961년 창단후 첫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애너하임은 특히 4승 모두를 역전승으로 뒤집는 무서운 뒷심을 보여줬고 1982년이래 월드시리즈 7차전서 홈팀 불패의 신화도 이어갔다.

샌프란시스코는 전신인 뉴욕자이언츠가 54년 클리브랜드를 꺾고 우승한 이후 ‘우리시대 최고의 타자’ 배리 본즈를 앞세워 48년만의 정상탈환에 나섰으나 우승고지 9부 능선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98년 월드시리즈 사상 처음 와일드카드로 가을잔치에 초대를 받은 아메리칸리그(AL)의 애너하임과 내셔널리그(NL)의 샌프란시스코가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두팀은 전문가들의 감(感)과 각종 데이터를 비웃기라도 하듯 스타군단 ‘영원한 제국’ 뉴욕 양키스와 랜디존슨ㆍ커트실링 ‘원투펀치’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잠재우고 마침내 꿈의 무대에 올랐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르고 꿈의 무대에 선 두 팀은 타자를 압도하는 초특급 에이스가 없어 경기 시작전부터 치열한 난타전을 예고했다. 과연 경기 뚜껑을 열자마자 대포와 소총부대의 화력이 불을 뿜었고 각종 진기록이 줄을 이었다.


와일드 카드로 올라와 사고 치다

박찬호의 텍사스 레인저스와 함께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 소속된 애너하임은 1961년 창단하였다. 연고지는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이며 카우보이 영화배우로 명성을 얻은 진 오트리(Gene Autry)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라는 팀 이름으로 창단했다. 65년부터 96년까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란 이름을 거쳐 97년 지금의 구단주 디즈니사가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팀명을 바꿨다.

에인절스(Angels)는 창단 당시 연고도시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유래되었다. 그동안 애너하임은 리그 우승 조차 한번 해보지 못한 약체 구단이었다. 90년대 들어서는 단 한번도 지구 우승을 따낸 적이 없다. 지금까지의 성적은 포스트시즌 진출만 4차례.

하지만 올해를 제외하면 모두 1회전에서 낙마했다. 창단 2년만에 아메리칸리그 3위에 오르며 기세를 떨쳤으나 79년에야 포스트시즌을 첫 경험했다. 캔사스시티 로열스를 제치고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한 해였다.

창단 18년만의 일이다. 82, 86년 다시 서부지구 우승을 거머쥐었으나 이후에는 계속 하위권에 머물렀다. 1986년을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과 인연이 없었던 애너하임은 올시즌 초만해도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의 들러리로 예상됐다.

정규리그 개막후 20경기를 치르는 동안 6승14패로 부진했던 애너하임은 후반기 들어서 잇단 역전극을 연출하며 페넌트레이스 99승63패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이어 지구2위를 차지, 와일드 카드로 ‘가을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홈구장은 1966년 개장한 4만5,050명 수용규모의 에디슨 인터내셔널 필드다.


AL 최강의 강타선…대포군단

2000년 마이크 소시아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나서 팀 분위기를 일신한 애너하임은 AL최강의 파워를 자랑하는 강타선으로 탈바꿈했다.

그 해 82승 80패로 5할 승률을 올렸고 빅리그 데뷔2년만에 AL홈런왕에 오르는 괴력을 과시한 트로이 글로스 등 신예들의 성장은 소시아 감독의 리더십이 만든 ‘작품’이었다. 올 정규리그 홈런 152개(메이저리그 21위)에 불과하던 애너하임은 포스트시즌 들어 9경기서 17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대포 군단’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네소타와의 5차전에서는 7회 한 이닝 동안 무려 10점(PS 한 이닝 팀 최다 득점 타이)을 뽑아냈고 애덤 케네디는 이날 3개의 홈런(한 경기 개인 최다 타이)을 날리는 괴력을 선보였다.

애너하임은 그러나 정규시즌에서는 홈런보다 소총의 공격력이 돋보였다. 팀 새먼(타율2할8푼6리-22홈런)-개럿 앤더슨(3할6리-29)-트로이 글로스(2할5푼-30)가 이끄는 다이나마이트 타선은 정규리그 1위의 팀 타율(2할8푼2리)을 올렸다.

특히 뉴욕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서 세운 팀 타율 3할7푼6리는 역대 포스트시즌 단일 시리즈 최고기록을 남겼다.


철벽 마운드…불펜의 승리

애너하임의 우승 공을 따지자면 불펜진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다. 애너하임 불펜의 성공스토리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로드리게스는 메이저리그에 올라올 때까지 완전히 무명 선수였다.

로드리게스는 올해 마이너리그에서 83이닝을 던지는 동안 12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이미 마무리로의 대성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비전시리즈와 리그챔피언십시리즈를 치르는 동안 4승을 따내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로드리게스는 월드시리즈2차전 6회에 등판, 본즈와도 정면대결을 펼치며3이닝 동안 상대타선을 퍼펙트로 틀어막아 포스트시즌서만 5승째를 챙겼다. 이밖에 벤 웨버ㆍ브렌든 도넬리, 최고의 마무리 트로이 퍼시벌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퍼시벌은 최근 2년 동안 79세이브를 기록한 ‘철벽’이었다.


2004년까지 전력누수 없어

불방망이를 과시한 애너하임의 라인업은 적어도 몇 년간은 ‘전력누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럿 앤더슨ㆍ대린 어스태드ㆍ 팀 새먼ㆍ 트로이 글로스ㆍ벤지 몰리나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의 계약만료 기간이 대부분 2004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라몬 오티스ㆍ케빈 에이피어ㆍ트로이 퍼시벌 등 기둥 투수들도 계약이 2004년 이후다.

특히 로드리게스(20)와 존 랙키(24) 등 ‘영건’들이 싱싱한 어깨로 무장한 채 뒤에 버티고 있다. 이들 주전들의 나이가 젊은 것도 애너하임의 보이지 않은 힘이다. 소시아 감독은 “(내년 시즌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흥분된다”고 말했다.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1차전, 본즈 첫타석서 홈런

샌프란시스코가 4번 타자 본즈의 월드시리즈 첫 무대, 첫타석에서 터진 홈런포에 힘입어 4-3승리. 샌프란시스코는 포스트시즌 3개 시리즈 모두 첫판을 따내는 행운을 이어갔고 애너하임은 첫판을 모두 잃는 징크스에 울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 타자 쓰요시 신조는 이날 대타로 출전, 5회초 첫 안타를 뽑아냈는데 이는 동양인 타자의 월드시리즈 첫 안타로 기록 됐다.


2차전, 애너하임 “멍군이오”

애너하임의 소총부대가 무차별 난사를 터뜨린 한판이었다. 애너하임의 11-10 짜릿한 역전승. 두팀은 홈런 6방 포함, 장단 28안타를 주고받으며 21번이나 홈플레이트를 밣았다. 93년 월드시리즈 4차전서 토론토가 15-14로 필라델피아을 물리친 이후 최다 점수. 본즈 1,2차전 연속홈런을 쏘아올렸고 메이저리그 현역선수 중 최장 1,388경기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애너하임의 팀 새먼은 2회와 8회에 각각 투런홈런포를 가동, 승부를 결정지었다.


3차전, 본즈 3연속 홈런포 가동

샌프란시스코가 애너하임을 홈구장인 퍼시픽 벨파크로 불러 들였다. 애너하임의 10-4 완승. 애너하임은 3,4회 월드시리즈 사상 처음 타자일순하며 대거 8득점, 역전승을 장식했다. 본즈는 5회 3점 아치를 터뜨려 월드시리즈 1,2,3차전 연속 홈런포를 가동했는데 이는 58년 뉴욕 양키스의 행크바우어 이후 처음이다. 본즈는 이로써 포스트시즌 통틀어 홈런 7개로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웠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97년 월드시리즈 MVP 리반 에르난데스는 6실점, 포스트시즌 무패(6승)행진 기록을 접어야 했다.


4차전, 거인들 40년만에 웃다

거인들이 안방에서 40년만에 웃었다. 샌프란시스코의 4-3 역전승. 샌프란시스코의 이날 홈구장 승리는 62년 월드시리즈서 뉴욕 양키스를 5-2로 꺾은 이후 처음이다. 애너하임의 트로이 글로스는 3회 투런홈런을 쏘아올려 포스트시즌 7호째를 기록, 본즈와 타이를 이뤘다.


5차전, 제프켄터의 날

제프켄터의 날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16-4완승. 본즈가 첫타석서 월드시리즈 첫 안타(2루타)를 터뜨렸다. 6,7회 켄터의 연타석 투런홈런과 8회 리치 오릴리아의 쓰리런 홈런을 얻어맞고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6차전, 5-0에서 5-6으로 뒤집기

애너하임의 홈구장 에디슨 필드로 옮겨 치른 6차전은 메이저리그 새기록을 쓴 명승부였다. 샌프란시스코는 7회까지 5-0으로 앞서면서 48년만에 월드시리즈 패권을 안는 듯 했다.

그러나 운명의 7회말 전광판에는 애너하임의 수호천사 ‘랠리 몽키’가 나타나 역전의 ‘마법’을 걸었고 스캇 스피지오는 신들린 듯 쓰리런 홈런포를 휘둘렀다. 마법은 곧 샌프란시스코에게 저주로 나타났다.

8회말 다시 1점을 추격, 5-4, 한점차로 좁혀졌고 트로이 글로스가 포스트시즌 7세이브 무패행진을 달리던 샌프란시스코의 롭 넨을 두들겨 주자 일소 2루타를 터뜨렸다. 애너하임의 기적 같은 6-5 역전승. 5-0에서 6-5로 역전시킨 경우는 월드시리즈 사상 처음. 본즈는 이날 홈런1개를 추가, 포스트시즌 8개로 새기록을 남겼다.


7차전, 천사들 하늘높이 날아오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마지막 한판. 2회 샌프란시스코가 1점을 선취했으나 애너하임은 2회말 곧바로 1점을 만회했으며 3회말에는 연속안타와 몸에 맞는 볼로 무사 만루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4번타자 개럿 앤더슨이 싹쓸이 2루타로 3득점, 대미를 장식했다. 애너하임의 4-1역전승.

최형철 기자

입력시간 2002/11/08 14:02


최형철 hc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