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즐겁다] 제주도

제주의 속살 '오름' 에서 맞는 늦가을 제주의 정취

제주도엔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바람과 돌과 여자만 있는 게 아니다. 한라산 너른 치맛자락에 안겨 둥근 박처럼 솟아난 오름들. 때묻지 않은 자연미가 물씬한 오름은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영원한 안식처다. 그곳에, 제주의 신화가 잠들어 있는 오름에 늦가을의 정령 억새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오름은 화산활동 시기에 폭발한 기생화산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이다. 제주도에는 일출봉, 산굼부리, 송악산 등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오름을 포함해 368개의 오름이 있다. 오름은 원형, 타원형, 말발굽 모양 등 그 모양이 다양하다.

제주도 중산간 지방에 밀집해 있지만 사라오름이나 산방산처럼 해안에 솟아 있기도 하다. 특히 제주도 동쪽 중부 송당리 일대는 100여 개의 오름이 몰려 있어 오름 왕국이라 불린다.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를 따라 성읍민속마을로 가다 목장 길로 접어든다. 삼나무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아늑한 초원이 나타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야성미 넘치는 초원. 길도 없는 초원을 헤치고 들자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빠진 오름 하나가 시야에 든다. 따라비오름(342m)이다.

제주 사람들조차 존재를 모를 정도로 산록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오름이다. 주변의 오름을 충분히 제압할 만큼 출중해서 ‘땅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것이 따라비가 됐다고 한다.

화산이 분출했던 분화구가 여섯개나 되는 이 오름은 산굼부리와 더불어 억새 좋기로 첫손에 뽑는다. ‘억새와 오름의 완벽한 만남’을 보여주는 따라비는 오름은 물론 주변의 초원도 억새가 그들먹하게 채웠다.


늦가을의 정취 가득

정오의 햇살을 받은 억새는 한창 물이 올라 반짝반짝 윤이 난다. 건 듯 부는 바람에도 자기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는 앞뒤로 물결친다. 그럴 때는 갈치 떼가 은비늘을 반짝이며 심해를 거슬러 가기나 하는 것처럼 눈부시다. 늦가을에 떠난 소풍처럼 아늑한 정취다.

따라비오름은 부드러운 구릉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산책하는 것과 같다. 키를 넘는 억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면 점차 하늘이 열리고, 굼부리가 제 몸보다 낮아져 어느새 깊은 우물로 변한다. 오름을 오르는 데 15분. 올라가는지도 모르게 오름의 끝에 서고 만다.

그러나 싱거운 발길과는 달리 정상에 서면 하늘에라도 닿아 있는 것 같은 고도감이 느껴진다. 안개에 휘감겨 상상의 산처럼 보이는 한라산의 어렴풋한 자태 아래로 제주도 중산간의 평원을 따라 이제 막 비상하려는 열기구처럼 오름이 펼쳐진다.

억새가 바람에 등 떠밀려 파도처럼 달려가는 초원 너머로 이어진 오름의 행렬. 자칫 황량하게 보일 수 있는 제주의 평원이 저마다의 모양과 높이로 봉곳봉곳 솟아난 오름 덕택에 생기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목장의 경계가 되는 삼나무행렬 안에서 한가롭게 가을볕을 쬐고 있는 소 떼의 휴식에선 평화도 느껴진다.

정상에서 바라본, 굼부리 다섯 개가 연이어 있는 따라비오름의 자태도 매혹적이다. 오름 전체가 억새로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굼부리를 감싼 선은 허공에 던져진 비단 띠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오름은 부드러운 선 때문에 여성에 비유되곤 한다. 그리움에 울컥 감정을 토하게 할만큼 부드럽게 감싸는 힘이 있다.

오름의 여성스러움은 모성(母性)으로 귀결된다. 제주인들은 오름에서 나고 오름을 터전 삼아 살다가 죽어서는 오름에 묻힌다. 길을 떠날 때는 오름을 좌표로 삼고, 마을은 오름에 기대어 터잡이를 했다. 제주인의 삶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끝내는 영원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오름. 그 따뜻한 모성은 오름 나그네에게도 늦가을의 아늑한 정취를 선사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김무진 여행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11/1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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