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단 부시 "거칠 것 없다"

중간선거서 공화당 압승, 재임중 상·하원 의석 늘린 최초의 대통령

미국의 중간선거가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틀 뒤인 11월 7일. 민주당 하원 지도자(원내총무)인 리처드 게파트 의원실은 한 장의 성명서를 내보냈다.

“우리는 민주당을 다시 다수당으로 되돌리기 위해 헌신할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1994년부터 8년 동안 하원의 소수당 지도자를 맡아온 게파트 의원의 쓸쓸한 퇴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여야 지도자의 엇갈린 명암

게파트는 성명에서 선거 패배의 책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번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기를 꼽았다. 하지만 그가 하원 지도자를 포기한 데는 당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가 이번 선거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는 당 안팎의 비판이 작용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게파트가 하원 지도자직을 포기하고 있을 때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내 대통령 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개선장군처럼 나타났다. 부시는 선거 이튿날인 6일 선거 결과에 대해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대통령은 침묵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침묵의 하루를 보낸 그는 7월 이후 가진 단독 기자회견을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최대한 활용했다. 집권 후반기의‘아젠다(의제)’를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부시는 이번 선거 결과로 미국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뒤바뀐 현실을 직시할 것을 민주당에 요구했다.

“선거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테러의 위협은 여전히 현실입니다. 상원은 미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강화할 국토안보부 설치법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새 의회가 구성되기 전이라도 내가 서명할 수 있도록 그 법안을 내 책상에 올려놓도록 해야 하는 것이 의회의 책무입니다.”

그동안 다수당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민주당의 견제로 통과가 보류됐던 국토안보법이 12일부터 열리는 레임덕 세션(중간선거 후 차기 의회구성 때까지 열리는 회기)중에 처리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차기 대선에 딕 체니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할 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출마한다면 체니는 내 러닝메이트가 될 것입니다. 그는 내가 바꿀 이유가 없을 만큼 초강력한 부통령입니다.”


혼돈의 민주당 "지도자가 없다"

게파트의 하원지도자 사퇴 선언과 부시의 연설은 2004년 대선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선거에 참패한 민주당은 14일 게파트의 뒤를 이을 하원지도자 선출을 위한 경선을 계기로 2년 뒤의 대선과 상ㆍ하원 선거를 위한 본격적인 체제 정비에 나설 예정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상ㆍ하원 및 주지사 선거 등 모든 부문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40년간 장악해 온 하원을 공화당에 빼앗기고 상원에서 소수당으로 전락한 이후 최악의 패배를 맛본 셈이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무력했던 지도부를 성토하는 분위기속에서 당의 체질을 탈바꿈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14일 경선에서 민주당 차기 하원지도자로 선출될 것이 확실한 낸시 펠로시(62ㆍ여ㆍ캘리포니아) 의원은 당이 공화당과 뚜렷이 차별화하는 정책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2년 뒤 다수당 탈환을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그가 하원 지도자가 될 경우 당이 지나치게 좌익으로 쏠려 보수층 유권자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민주당의 가장 큰 고민은 혼돈에 빠진 당을 구하고 향후 대선을 승리고 이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없다는 데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해 5월부터 상원 다수당 지도자로 활약했던 톰 대슐 상원 지도자(원내총무)는 이번 선거의 패배로 지도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하원 지도자직을 벗어 던진 게파트는 본격적으로 대선 출마 준비에 매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가 당내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하원에서의 이라크 전쟁결의안 처리를 주도한 것은 대통령 출마를 위한 사전 포석의 성격이 강했다.

1991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걸프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던 과거의 투표 성향이 안보 문제가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2004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의 공격 재료로 쓰일 소지를 사전 차단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결의안에 쉽게 동의해준 게파트에 대한 당내의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하원 의석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공화당에 3석 이상을 빼앗김으로써 선거 책임론의 직접적인 타깃이 되고 있다.

앨 고어 전 부통령도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이다. 고어는 지난 대선 당시 검표 시비의 진원지였던 플로리다주의 주지사 선거를 설욕의 기회로 삼기 위해 민주당 빌 맥브라이드 후보 지원에 총력을 쏟았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 주지사가 큰 표차로 대승을 거두고 고어에게 통한의 패배를 안겨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캐서린 해리스 전 플로리다 국무장관까지 하원의원에 당선함으로써 고어의 플로리다 복수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목소리 커진 부시

이번 선거는 부시 대통령을 위한 선거였다. 미국의 언론들은 공화당의 압승이 부시 대통령의 코테일(coattail) 효과에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67%에 이르는 개인적 인기를 무기로 접전지역을 돌며 공화당 후보들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10월 31일부터 선거일 직전일인 4일까지 대통령 전용기인‘에어포스 원’을 타고 15개 주를 누비면서 “동맹군(ally)을 의회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호소가 더 많은 공화당 지지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데 동인이 됐다는 게 선거 분석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그 결과로 부시 대통령은 재임 첫 임기 중 상ㆍ하원 의석을 모두 늘리는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지난 한세기 동안 미국 선거 사상 현직 대통령이 첫 임기 중 치른 중간선거에서 자신이 소속한 당의 하원 의석을 보탠 경우는 1934년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가 유일하다.

하원 의원의 경우 30석, 상원 의원의 경우 3~4석을 잃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대통령 소속당의 중간 선거 패배’ 징크스는 한방에 날려버렸다. 49석이던 상원은 2석을 보태 51석을 확보해 지난해 5월 제임스 제퍼즈(버몬트) 의원의 탈당으로 빼앗겼던 다수당 지위를 탈환했다.

다수당을 차지해온 하원에서는 최소한 3석을 추가 확보, 민주당과의 격차를 더욱 늘려 놓았다. 열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됐던 주지사 선거에서도 선전, 민주당의 과반수 확보를 저지했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수혜자도 부시 자신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부시가 도박에 성공, 확실한 보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번 대선의 승리로 ‘법선(法選) 대통령’의 오명을 씻고 2004년 대선 가도를 향해 줄달음 칠 수 있게 됐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반쪽 대통령이라는 시각은 엷어졌지만 플로리다 개표 시비에 따른 정통성 문제는 언제든지 불거질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런 평가는 부시 대통령이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집권 후반기의 대내외적 정책 기조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미로 통한다.

우선 이라크 공격 문제와 대 테러전의 확대 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장애를 받지 않을 전망이다. 또 국토안보부 설치와 10년 감세정책과 친 기업적인 에너지 정책, 경기부양정책 뿐 아니라 향후 고위법관 임명 문제 등 국내 정책 분야에서도 상당한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내외 정책 책임 떠안는 부담도

하지만 부시의 앞길에 청신호만 켜진 것은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공화당의 상ㆍ하원 장악은 부시에게 보상과 위험을 동시에 안겨주었다”고 지적했다. 이번의 성공이 오히려 그의 재선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부시와 공화당은 향후 대내외 정책 추진의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테러와의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 문제가 어렵게 꼬일 경우 그 책임도 부시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1991년 걸프전에서 승리하고도 재선에 실패했던 아버지 부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국내 문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가 그 앞에 놓여 있다.

워싱턴의 한 선거 전문가는 “미국의 유권자들은 대통령의 권한이 강하다고 생각할 경우 이를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며 “이번 선거에서 부시를 재신임한 유권자들이 언제 그를 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입력시간 2002/11/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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