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큰 조폭과 작은 조폭

1987년 1월 15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사망했다는 짤막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 직후 파문이 확산되자 당시 경찰은 박종철군이 수사중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후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마침내 공개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경찰의 구타와 전기고문 그리고 물고문에 의해 박종철군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당국은 이를 은폐하고자 했지만 진실은 만천하에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흐름 지금, 우리는 검찰에 의한 또 하나의 고문치사사건을 목도하고 있다. 11월 26일 검찰의 특별조사실에서 조사받던 살인 피의자 조천훈씨가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주검을 부검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그의 사인이 “광범위한 타박상에 의한 2차 쇼크와 외부 충격에 따른 뇌내 출혈 등 두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밝혔다. 간단히 말해 죽도록 얻어맞아 죽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수사관들이 물고문까지 행한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과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최근의 조천훈 사건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고 물고문 당하고 그 결과 사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실이 말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인해 독재권력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민주화가 진행되었던 그간의 변화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황스럽고 황당할 뿐이다. 그것도 국가 공권력의 핵심인 검찰에서 말이다.

국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우리의 국가기구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에 대해 왜 그렇게 무감각한 것인가? 그 모두가 인권에 대해 말하고 토론하고 주장하고 있는 이 시대에 왜 그들만은 이 같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우연한 실수라 보지 않는다. 과거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경감이 자신의 확신에 따라, 그리고 일제 때부터 내려왔던 수사 관행 속에서 기꺼이 고문에 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 역시 그 동안의 수사 관행 속에서 수사관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작용한 가운데 비롯되었던 사건이라 생각한다.

실수가 아니라 관행과 적극적인 의지에 의해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요체가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인권 유린을 무시하는 수사의 관행과 그 의지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상당 정도의 폭력을 행사해도 상관없다는 국가 공권력의 수사 관행과 의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그러한 관행과 의식은 누가 뭐래도 자신들이 실제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질서 유지의 핵심 주체라는 그들의 권력적 자부심과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

이 같은 오도된 권력적 자부심은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의식하는 인권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비슷한 여러 사건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성치 못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란 일정한 영토 위에서 그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는 조직이다. 그런 만큼 그 물리력의 행사에는 어느 누구도 쉽게 저항하거나 거역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 권력의 행사를 시민적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투쟁의 역사의 바로 민주주의 역사였고, 이에 따라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의 생명과 권리에 대한 보호라는 분명한 원칙이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 권력이란 시민적 통제 하에서 그 행사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권력인 것이다. 그러나 국가 공권력이 시민적 통제와 관계없이 자의적으로 행사되게 될 때 그것은 조폭의 권력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번 사건은 인권이라는 시민적 통제에 개의치 않는 국가라는 큰 조폭에 의한 작은 조폭의 희생이라 할 수 있다.

정해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입력시간 2002/11/1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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