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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TV토론은 쇼가 아니다

[데스크의 눈] TV토론은 쇼가 아니다

<힐러리라는 말만 나오면, 그 사람 머릴 쪼개 버리십시오. 말을 다 끝나게 놔두지 마시고.” 클린턴은 내말대로 했다. 완벽한 반격이었고 브라운은 속 좁고 사실을 혼동하는 인간으로 보이게 되었다.>

아칸소주 출신의 무명 주지사 빌 클린턴을 백악관의 주인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지 스테파노폴러스 전 백악관 공보담당관이 정치 회고록 ‘너무나 인간적인’(All too humanㆍ1999년)에서 쓴 TV토론 대목이다.

‘쪼개 버린다’는 섬뜩한 표현에 놀라게 되지만 상대는 예비선거에서 만난 거물급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이 토론에서 힐러리(클린턴의 아내)가 로즈 법률회사에서 일할 때 아칸소주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클린턴의 도움으로 ‘사익’을 챙겼다는 의혹을 제기하면 곧 바로 대응하라고 한 주문이었다.

클린턴이 중앙무대에 겨우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캠프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만하다.

<브라운과의 토론 준비를 하면서 그런 공격을 예상했기 때문에 우리는 클린턴에게 세게 받아치라고 강조했다. 부인을 보호하려는 분노는 효과가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기사도라고나 할까?>(‘너무나 인간적인’중에서)

스테파노폴러스의 계산은 적중했고, 클린턴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미국 대선에선 TV토론은 이제 국가적인 ‘쇼’ 정도로 치부되지만 후보로서는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말 실수로 상대에게 꼬투리라도 잡히면 그 타격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가능한 한 상대방의 공격 타킷을 흐리면서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말하는 ‘방어적’ 전술이 ‘최고’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상대적 약자였던 클린턴은 이러한 선입관을 뒤집는, ‘머리를 쪼개 버리는’ 맞대응으로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결과적으로 백악관으로 향한 길을 뚫었다.

대선 후보 TV토론이라면 ‘케네디의 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노련한 정치인 닉슨과 첫 TV 토론을 가졌을 때 케네디는 짙은 감색 양복을 입었다. 닉슨은 엷은 회색 양복 차림. 밝은 조명아래서 양복 색깔만으로도 ‘잘 생긴’ 케네디는 젊고 참신하게 비춰졌고, 닉슨은 이빨 빠진 늙은 사자처럼 보였다.

또 닉슨의 여유 있는 발언에 맞서 케네디는 빠르고 명쾌한 말투를 사용했다. TV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 대결에서 케네디가 일찌감치 점수를 따고 들어간 것이다. ‘정책대결은 그 다음’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닉슨의 실책이었다.

TV토론은 총체적인 이미지 대결이다. 이는 양복에서부터 헤어스타일, 넥타이, 표정, 말투, 제스추어, 상대 공격에 대한 대응 방식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혼합체다.

클린턴의 경우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TV토론에서 ‘애송이 같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평소에 즐기던 붉고 푸른 줄무늬 넥타이를 매지도 않았고, 그 유명한 구호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경제!’(Its the Economy, Stupid!)를 거듭 입에 올렸다. 유권자들의 선택이 미래를 향한 기대와 과거에 대한 평가 사이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한 전략이었다.

그만큼 경제는 재선을 노리는 부시의 결정적인 취약점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은 냉전 종식과 걸프전 승리라는 부시의 과거 업적보다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클린턴의 비전에 표를 던졌다.

지루하게 진행되던 우리나라의 대선 레이스가 민주당 노무현,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전격적인 단일화 합의로 활기를 되찾았다. 각 대선 캠프 안팎에 나돈 구호래야 지금까지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 정-노 후보의 ‘낡은 정치 청산’정도였는데, 이제는 세대교체와 정권교체라는 첨예한 쟁점으로 대립 각을 세울 전망이다.

최대의 볼거리는 역시 노-정 후보의 단일화를 위한 TV토론이 아닐까 한다. 젊은 두 후보가 자신의 이미지와 정책,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입’으로 겨루는 TV토론은 지켜볼 만할 것이다. ‘케네디’식 이미지 대결에서 ‘클린턴’식의 화끈한 말싸움과 비전 제시에 이르기까지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기만 하면 ‘노풍’이든 ‘정풍’이든 세찬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전후(한국전쟁)세대 답지 않게 노회한 정치인 이미지를 준다든가, 네거티브 선거전략에 기댄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귀족형과 서민형, 직설적 화법과 두루뭉실한 화법 등 차별화된 두 사람의 TV대결이 우리의 대선 레이스를 ‘3김’ 시대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2/11/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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