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장희빈 "카리스마를 보여주마"

여배우에겐 선망의 캐릭터, 김혜수의 선굵은 연기에 기대

단종, 수양대군, 태조, 연산군, 광해군, 사도세자, 대원군, 명성황후.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요 소재로 다루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다. 장희빈이다.

이들의 삶이 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립 인물의 갈등 구도, 권력을 둘러싼 암투 등 드라마적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중에서 여자 연기자라면 한번쯤 맡고 싶은 배역이 장희빈이다. 장희빈의 타이틀롤을 맡는 다는 것은 스타화로 가는 첩경 또는 인기의 절정으로 몰고가는 기제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여배우로서 연기 인생을 걸고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고 누구보다도 잘 해낼 자신도 있다. 이미숙 선배의 장희빈의 열연은 잊을 수가 없다.”

최고의 출연료와 16년만의 사극 드라마 출연 등으로 화제를 모으고 동시에 영화사와 출연 이행 문제로 고소 당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며 6일 첫방송된 KBS ‘장희빈’의 타이틀롤을 맡은 김혜수의 출연 소감에서도 장희빈이라는 캐릭터가 여배우에게 있어 갖는 매력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김혜수뿐만 아니다. 김영애를 비롯해 연기파 스타로 잘 알려진 고두심 등 중견 연기자들은 한결같이 젊은 날 장희빈 역을 맡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말을 할 정도다.


인기ㆍ연기력 두마리 토끼 잡기

왜 여배우들의 선망의 캐릭터가 장희빈인가. 실재했던 장희빈의 여성적 매력과 극중에서 묘사되는 장희빈이라는 캐릭터의 연기적 특성 때문이다.

장희빈(1662~1701)은 중인신분으로 태어나 가문의 몰락으로 어려서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고 왕자 윤(후에 경종)을 낳아 희빈으로 승격했으며 인현왕후를 폐위해 왕비에 올랐으나 인형황후의 복위와 함께 황후의 무고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폐위되면서 사사되는 영욕의 세월을 살다간 여인이다.

장희빈이 빼어난 외모를 갖춘 요부와 당쟁의 권력 암투를 활용한 권력욕의 화신이었다면 인현왕후는 전형적인 국모상이며 현모양처의 상징이다.

장희빈은 빼어난 외모와 섹시함(요부적 기질)을 갖춘 여성이었다는 점과 신분을 뛰어넘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의지의 인간이라는 점이 여성 연기자들에게 매력으로 다가 온다.

또한 운명의 부침이 극적인 장희빈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주연을 하는 연기자는 고강도의 카리스마와 연기력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장희빈이 갖는 강한 극성(劇性) 때문에 시청자나 관객의 눈길을 쉽게 끌어당길 수 있어 여자 배우들은 인기와 연기력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역사는 어제와 오늘의 대화이듯 그 동안 장희빈은 시대 상황에 따라 의미가 새롭게 첨삭되고 다르게 묘사돼 왔다.

고도성장과 함께 전통적인 도덕관이 붕괴하고 향락산업이 급팽창했던 1960~1970년대 장희빈을 소재로 했던 영화와 드라마는 질투와 요부의 화신으로서의 장희빈에 초점을 맞췄다면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1980~1990년대의 작품들은 운명과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장희빈을 그려왔다.

이러한 해석과 묘사의 차이와 함께 연기자들의 외모와 개성 그리고 연기적 스타일 역시 다른 색깔의 장희빈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 동안 장희빈은 영화로는 두 번, 드라마로는 네 번 제작됐다. KBS가 요즘 방송하고 있는 ‘장희빈’은 드라마로는 다섯 번째이다.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라는 1960년대에 장희빈을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선보였다.

한편은 1961년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김지미 김진규 주연의 ‘장희빈’과 1968년 임권택 감독이 큐사인을 낸 남정임 신성일 주연의 ‘요화 장희빈’이다. 드라마로는 1971년 윤여정 주연의 MBC 일일극 ‘장희빈’, 1982년 이미숙 주연의 MBC 드라마 ‘여인열전-장희빈’, 1987년 전인화 주연의 MBC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 1995년 정선경 주연의 SBS ‘장희빈’이다.

김지미와 남정임이 인기 절정의 스타의 자리에서 장희빈 역을 맡았다면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등 드라마 연기자들은 장희빈 출연으로 스타로 비상했다.

이들은 장희빈 출연 당시 김지미가 21세, 남정임 24세, 윤여정 24세, 이미숙 23세, 전인화 22세, 정선경 23세 모두 20대초중반 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외모적인 특성 역시 날카로운 분위기에 체형은 비교적 날씬하다는 유사점이 있다.


각인각색의 캐릭터 보여줘

하지만 이들이 드러낸 장희빈은 변별점이 뚜렷하다. 윤여정이 권력의 암투적 측면과 권모술수적인 독성이 강한 카리스마의 장희빈을 뿜어냈다면 이미숙은 상당부분 요부적인 섹시함과 관능미의 장희빈을 표출해냈다.

전인화는 카리스마의 강도는 윤여정이나 이미숙에 떨어지지만 상대 배역인 인현왕후의 박순애와 대비되는 외모적 분위기의 장희빈을 웬만큼 소화해냈으며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으로 전인화식 장희빈을 연출해냈다.

데뷔작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 에서 파격적인 노출 신으로 논란을 일으킨 직후 장희빈에 캐스팅 돼 화제를 모았던 정선경은 영화에서 얻은 섹시한 이미지를 장희빈에 투영시키려 했지만 연기력 부족으로 선배들이 그린 장희빈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KBS ‘장희빈’의 김혜수는 이전 장희빈 역을 맡은 배우들과 여러 면에서 차별화 돼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전 여자 연기자들과 달리 김혜수는 3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장희빈 역에 도전했다. 김혜수의 나이는 장희빈이 39세라는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과 어린 시절의 장희빈부터 연기를 해야한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또한 그 동안 장희빈 역을 맡았던 배우들의 외모적 특성과 연기 스타일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윤여정을 비롯한 이전의 배우들이 장희빈의 카리스마를 손쉽게 드러낼 수 있는 날씬한 체형과 날카로운 얼굴의 이미지를 가졌다면 김혜수는 글래머적인 외형을 가졌다. 연기 스타일 역시 이전 연기자들이 섬세한 연기 스타일이라면 김혜수는 선이 굵은 연기를 주로 해왔다.

그러나 김혜수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어 한다. “당차고 씩씩한 모습 때문에 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신분제에 반발하고 공정하지 못한 것에 저항하는 새로운 여성상으로서의 장희빈을 그려간다는 제작진의 기획의도를 충분히 살릴 것이다.”

제작진은 이전의 장희빈이 권력의 화신이나 요부로서의 여성성을 강조한 장희빈과 달리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발현하는 독립적인 여성상으로 장희빈을 그려나가겠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이전 드라마 제작진도 그러한 의도를 밝힌 바 있지만 장희빈이 갖는 강한 극성과 시청률을 올리려는 노력으로 인해 인현왕후와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독립적인 여성성보다는 간교하고 요부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춰 드라마를 전개하는 바람에 사극의 범위를 ‘치마사극’으로 회귀시켰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만약 이러한 제작진의 확고한 의지와 김혜수의 선이 굵고 개성강한 연기가 조화를 이룬다면 새로운 21세기형 장희빈이 탄생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또 하나의 아류적 장희빈만을 확대재생산하고 연기자 김혜수의 스타성도 하락할 것이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2/11/2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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