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살인을 부르는 왕따사회

얼마 전 지하철에서 약간 불량끼가 도는 10대 청소년 대여섯명을 만났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웃고 떠드는 모습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중에서도 남녀 한쌍은 ‘커플’인듯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남친’을 쳐다보는 여자의 눈길은 어미로부터 먹이를 간청하는 새끼 새마냥 간절해 민망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여자 친구가 “아, 짜증나, 지하철에서 왜 난리야”라고 하자 대뜸 “씨댕할 X, 네가 왜 참견이야”라고 대꾸하는 장면은, 해도 너무 한다는 느낌이었다.

요즘 이런 장면은 흔하다. 숨기거나 막힘이 없는 10대 젊은이들이 있는 한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표현도, 행동도 주변을 의식하기 보다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에 따르는 이들의 행동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로 단선적으로 나타나고, 또래 집단에서 ‘싫은 대상’으로 찍히면 따돌리기 마련이다.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솔직한 감정 표현이 낳은 부정적인 측면인데, 거기에는 상대에게 싫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인, ‘3척’이 숨어 있다. 잘난 척, 예쁜 척, 착한 척하는 ‘3척’은 또래 집단으로부터 역겨운 감정을 부르고, 그것이 따돌림으로 발전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교육개발원의 조사에서도 초ㆍ중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잘난 척, 예쁜 척, 착한 척’(75.6%)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왕따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고 한다. 또래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 아이를 ‘찌지리’라고 하는데, “아, 재수없어. 저 찌지리!!”라는 말로 ‘따’가 시작된다. 찌지리의 어원은 정확하기 않지만 ‘잘 놀지도 못하면서 노는 척’하는 아이를 지칭하는데, 그런 감정이 또래 아이들에게 전파되면 서서히 왕따로 변해간다.

그 다음은 ‘반따’다. ‘반따’는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고, ‘전따’는 전교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뜻한다. ‘은따’란 말도 있는데,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로, 겉으로 보기에는 따돌리는 것 같지 않는데 결국은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왕따가 사회문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서울에서 최근 발생한 10대 ‘왕따살인’사건은 ‘왕따가 이제는 살인을 부르는 무서운 사회 병’임을 일깨워 주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자취집에서 “남자 앞에서는 착한 척하면서 여자 앞에선 말을 바꾼다”는 이유로 함께 지내던 여학생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척’이었다. ‘척’때문에 단순 왕따가 아니라 살인적 폭력을 택한 무서운 아이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왕따를 부르는 요인들이 널려 있다. 인기 가수의 팬클럽에서 함께 잘 지내다가도 말 바꾸기 몇 번으로 왕따 살인이 일어나는 판에 뭔들 이유가 되지 않을까? 머리 스타일에서 그 흔한 휴대폰의 엽기 멘트에 이르기까지 또래의 집단 문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따’를 당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도 반응이 너무나 즉흥적이어서 흉내내기가 모자라면 ‘찌지리’가 되고, 너무 튀면 아이들 말로 ‘죽음’이니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란다.

왕따는 80년대 말~90년대 초 일본에서 큰 사회문제가 됐던 ‘이지메’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를 진지하게 분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일본은 이지메에 이어 원조교제, 엽기폭력, 동반자살 등 청소년 문제가 불거지면 교육계는 물론 문학계 등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근본 원인에 접근하려고 애써왔으나 우리는 너무 단편적이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 10대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작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유미리가 있다. 스스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녀는 97년 일본을 흔들었던 고베 연속살인사건을 소재로 돈에 눈이 먼 사건의 범인인 14세 소년의 내면을 심도있게 그린 ‘골드러시’를, 뒤이어 ‘원조교제’라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다룬 ‘여학생의 친구’(2000년 열림원)를 내놓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청소년 문제는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돈 앞에 무너지는 가정과 사회, 무관심한 학교가 두루 얽혀 문제를 키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진지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왕따 문제를 접할 때마다 우리에게도 유미리와 같은 작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사회심리학적으로 문제의 근본원인에 진지하게 접근하면서도 탄탄한 구성에 작품성, 가감 없는 현장성을 살린 작품이라면 교육계의 10가지 대책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2002/11/2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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