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신비주의 마케팅

화면의 왼쪽 절반은 가려져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가 헤드폰을 끼고 음반을 고르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갑자기 가려진 화면 쪽을 보더니 환한 표정을 지으며 '준'이라는 이름을 부른다. 그러자 왼쪽의 화면에 "어느 날 우연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준을 만났다"라는 알쏭달쏭한 카피가 뜬다. 같은 포맷의 다른 버전도 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모델이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다.

어떤 가벼운 예감이라도 스쳐간 듯 우연히 고개를 들어 왼쪽의 가려진 화면을 본다. 그리고는 '준'을 부르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환한 표정과 함께 왼쪽 화면에 "어느 날 우연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준을 만났다"라는 카피가 제시된다. 그걸로 광고는 끝이다.

이 광고를 텔레비전에서 접하게 되는 시청자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준이 뭐야?' 상품의 정체를 일시적으로 숨겨 시청자를 궁금하게 만듦으로써 상품에 대한 기대와 인지도를 넓혀 가는 광고방식을 티저(teaser) 광고라고 한다.

티저는 놀려대는 사람, 또는 짓궂게 약 올리는 사람을 말한다. 티저 광고의 문법은 가림과 드러냄이다. 광고의 초기 단계에는 상품과 관련된 기본적인 정보마저도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완성된 상품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곧 정체가 밝혀질 것이라는 메시지만이 간접적으로 전달될 따름이다. 그리고 베일을 벗고 상품의 정체가 제시되는 후속 광고가 뒤를 받치게 된다.

티저 광고가 우리에게 낯선 형식의 광고기법만은 아니다. 지난번 대선 즈음이었을 것이다. 흰 바탕에 손으로 쓴 것 같은 글씨로 '선영아 사랑해'라는 카피를 내세워 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여성 인터넷 사이트의 광고가 대표적인 티저 광고이다.

그 이후에도 티저광고 기법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정확한 통계를 내봐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동통신 광고에서 많이 활용되었던 기억이다. 호기심어린 눈을 가진 한 소녀가 등장하는 TTL광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아이'라는 컨셉트에 초점을 맞춘 마이크로 아이(i) 광고, '새로운 것이 온다'는 카피만 제공했던 카이(Khai) 광고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주로 신비주의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상품과 광고의 무연성(無緣性)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티저 광고 '준'이 최근에 베일을 벗었다. '준'은 휴대전화를 통해 영화·뮤직비디오·뉴스·TV프로그램 등의 동영상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서비스 브랜드의 명칭이다. 손 안의 작은 영화관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인 멀티미디어 서비스이지만, 광고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것과 같은 일상의 작은 놀라움을 강조하고 있어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신비로움이라는 종전의 컨셉트를 버리고 일상의 우연과 작은 놀라움으로 컨셉트를 전환했다는 점에서도 '준'은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광고 '준'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은 티저 광고와 타이업(tie up) 전략이 통합되어 나타난 점이다. 타이업은 다른 업종들이 상호간의 제휴를 통해 비용은 절감하면서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마케팅 전략의 하나이다. '준'광고는 박진영 사단의 남성 4인조 그룹 '노을'과 타이업 전략을 구사하며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광고에서는 '노을'의 노래 일부분이 잠시 흘러나올 뿐이고 신상 정보는 전혀 알리지 않는다. 티저 광고인 '준'속에 신인그룹 '노을'에 대한 또 다른 티저 광고가 들어 앉은 형식이다. 노을의 모습은 내년 2월까지 '준'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텔레비전은 물론 각종 매스컴에 절대 노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광고음악, 드라마 주제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OST 등을 통해서 음악을 알리는 타이업 방식은 특히 일본에서 일반화된 음반판매 전략이다.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빙(Being) 계열의 가수들은 텔레비전 방송출연, 라이브공연, 뮤직 비디오, CF 출연 등과 같은 기존의 홍보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중매체의 배후로 몸을 숨기고 CF의 배경 음악이나 드라마 주제곡 등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도 유지하고 대중의 호기심도 불러일으킨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자드(zard)의 사카이 이즈미 역시 10년이 넘는 가수생활 동안 텔레비전 출연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한국에서도 강타가 '북극성'으로 매직n과의 타이업 전략을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노을'의 경우 타이업 전략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과연 대중들은 이러한 홍보전략에 대한 어떤 반응들을 보이게 될까.

입력시간 2002/12/0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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