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 가수' 방의경 8년만의 귀국

1970년대 대표적 포크 곡 ‘아름다운 것들’을 작사한 방의경이 최근 미국에서 8년만에 귀국했다. 전설적인 여대생 포크가수로 팬들의 머리에 남아 있는 방의경은 김민기, 양희은 등과 함께 당시 청년 문화를 주도했던 포크 1세대. 당시 번안 곡 부르기에 급급했던 대부분의 포크 가수들과는 달리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김민기, 한대수, 김의철과 같은 저항적인 창작 곡을 불렀던 정통 포크 가수였다.

상업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방의경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존재이다. 대중이 기억할 만한 그녀의 노래는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로 시작되는 양희은의 히트곡 ‘아름다운 것들’과 김인순, 김세화가 부른 ‘하양나비’, 그리고 대표 곡 ‘불나무’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운동권에서 즐겨 부른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11월 19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방의경은 “고국 땅을 밟으니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금년 3월, 대학 후배로부터 제 노래의 추억을 간직하는 분들이 인터넷사이트 윈드버드(www.windbird.pr.kr) 에 전문게시판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방문은 특별한 음악활동이나 사업 관계보다는 대단치 않은 제 노래를 기억해 주는 분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입니다”고 웃었다. 1976년 결혼과 함께 이민을 떠난 그녀는 현재 미국 LA에서 액세서리 디자이너 ‘클래어 방’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미조와 함께 노래 잘하는 이대 쌍두마차

그녀가 남긴 것은 어린 날의 감성을 티없이 맑은 노래말로 담은 독집 음반 한장이 전부다. 평범한 통기타 선율에 얹어 들려주는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가사는 듣는 이의 가슴을 비수로 꽂는 듯하다.

그녀의 독집은 “돈과 상관없이 구해달라”는 마니아들이 줄을 섰을 만큼 200만원을 호가하는 가요음반의 여왕으로 대접 받고 있다. 화려한 가창력도, 뛰어난 기타실력으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지만 방의경의 노래는 한번 들으면 벗어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방의경 노래의 최대 무기는 꾸미지 않은 순수함과 은유적인 사회 저항성에 있다.

한국 최초의 불자동차를 만든 방응준씨를 부친으로 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 방의경은 사치보다는 검소한 삶을 추구했다. 양희은은 “어려웠던 시절 의경 언니의 인간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1968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방의경은 정미조와 더불어 이화여대 미대의 ‘노래 잘하는 쌍두마차’로 유명했다.

또 그녀는 ‘내쉬빌의 두목’으로 불렸다. 내쉬빌은 대학생 싱어송 라이터들의 집결지로 명동의 청개구리 홀과 맷돌 공연과 함께 한국포크의 발원지로 꼽힌다.

동료 포크 가수들은 방의경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한대수는 “1974년 내 데뷔 음반 ‘멀고 먼 길’을 녹음할 때 귀한 야마하 기타를 선뜻 빌려줬다”고 회고한다. 서유석은 “작고 통통한 소녀였는데 음악은 단조로웠지만 가사는 참 맑았다”고 기억했다.

양병집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창작을 했던 여자 포크가수”라고 말한다. 청개구리 홀에서 사회를 보았던 김도향은 “감성이 풍부하고 품격이 있는 여대생 가수로 아름다운 자작곡을 직접 불렀던 기억이 난다”고 전한다.

방의경의 이번 귀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세은(사업)씨와 보배엄마(실명을 밝히는 것을 사양했다)라는 분이다. 박씨가 방의경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심야 라디오음악프로를 들으며 공부를 하던 그는 낯선 여가수의 맑은 목소리에 온몸이 얼어붙는 전율을 느꼈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노래였지만 그 노래 가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아니,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도 몰랐지만 힘들 때면 혼자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의 평안을 얻어 왔다고 한다.

그는 40줄에 들어선 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음악 친구들에게 공개했고, 한달 후 자신을 25년 간 묶어두었던 노래가 방의경의 ‘그들’임을 알게 됐다. 그는 “다시 노래를 듣게 되자 꿈인 듯 싶었다”고 말한다.

또 한 사람의 방의경 마니아인 보배엄마. 1974년 어느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의경의 ‘불나무’에 감전되었다. 당시 조숙한 중학생이었던 그녀는 “너무도 서늘한 음성으로 들려주는 선문답 같은 시적인 노래 말에 매료됐어요. 저 역시 한번 듣고 가사를 외웠습니다”고 털어놓는다.

진짜 마니아가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모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어느 날 종합검진에서 “가슴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혹이 크게 잡힌다.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날벼락과 같은 진단을 받고는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불나무’가 듣고 싶었다. 매일같이 청계천 중고음반가게를 뒤졌지만 허사였다. 마지막 희망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한 라디오프로에 장문의 사연을 적어 보냈다. 그녀의 애절한 사연에 감동한 담당PD는 어렵게 음반을 구해 방송했다.

그녀는 “불나무는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어려울 때면 불나무를 부르며 견디기 힘든 현실을 인내하곤 했습니다”고 말한다.

사연을 가진 두 사람이 귀국한 방의경과 만났다. 서로 반가움과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진한 포옹을 나눴다. 보배엄마는 “인터넷에 제 사연을 소개할 때도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고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 선생님이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와 이 자리로 달려왔습니다”고 말했다.

귀국 소식을 전해 들은 포크 마니아들은 그녀의 숙소인 경기 일산 근처의 별장으로 몰려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인공세를 하고 진지하게 노래에 대한 질문을 해오자 그녀가 감동했다.

방의경은 감사의 마음 전하기 위해 즉석 음악회를 열었다. 좀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의 의동생 김의철도 기쁜 마음으로 노래말문을 열었고 참석자들도 뜨겁게 호응했다. 김의철은 “마치 70년대 초반 명동 청개구리 공연이 재현된 착각을 느꼈다.

그 당시의 포크공연은 오늘처럼 무릎을 맞대고 노래와 사회와 인생을 토론하는 공간이었다. 작지만 오늘 공연은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며 흥분했다.


“이제 통일을 노래하고 싶어요”

저녁 8시에 시작된 공연은 새벽 2시를 넘겨서야 끝났다. 참석자들은 공연이 끝나고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윈드버드의 홈지기 이성길씨는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팬들과의 진솔한 교감에 감격한 방의경도 “그 동안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 버리고 살았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어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 갔습니다. 다리 끝에 걸려있는 수많은 이산 가족들의 사연과 사진들을 보는 순간 분단의 원통함을 전하는 원혼들의 흐느낌을 들었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스스로 되물었습니다. 이제는 통일을 위해 오랫동안 가슴 속에만 담아 두었던 우리 뿌리를 찾는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네요"라며 활동재개 의사를 내비쳤다.

한 케이블TV의 간절한 출연 제의에 “아무 준비도 없이 방송에 나가 노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사양했던 방의경은 작은 음악회 말미에 “용기를 주신 분들을 위해 꼭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참석자들 모두는 방의경의 귀국으로 70년대의 순수한 포크 정신이 부활되길 한마음으로 갈구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내년이 기다려진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12/02 17:5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