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10대] 폭력의 소나기…우산이 없다

일상화된 폭력성에 무방비로 노출된 10대

‘20시간 30분을 쉬고 27시간 30분을 공부했다. 숙제가 태산 같다. 11장의 주말 과제, 14장의 수학 숙제. 난 그만 다니고 싶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와 지고 싶다.’ 한 소년의 마지막 절규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경쟁은 모범 답안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회가 범생이의 것만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영화 ‘매너0’가 제도권을 벗어난 일탈의 정서를, 영화 ‘폭력 교실’이 폭력에의 갈증을 풀어준다.

OECD의 가입으로 한국은 장밋빛 미래를 보장 받았을까? 한국인들은 과연 지금 개성과 자유가 보장되는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을까? 물고기 같은 자유는 한국에 없을까?


폭력의 거울 앞에서 야만을 흉내낸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영화 ‘친구’(곽경택 감독)에서는 학교가 소수의 학생들을 차별화시켜 그들을 폭력의 세계로 내몰아 붙이는 과정이 ‘갱스터 무비’ 뺨치는 선혈의 영상으로 펼쳐진다. 학교서 교사들이 이른바 문제아들을 내모는 방식에서 그들이 거친 언행으로 맞서는 과정까지, 폭력은 일상의 수준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강조하는 영화다. 영화가 제시하는 폭력상은 극사실주의다. 일체의 여과도 없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면 90%는 절명한다. 배를 찔러야 한다. 찌르고 나면 90도로 날을 돌려준다. 칼 맞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깡패들의 수업 광경이다. 조폭들이 왜 가슴이 아니라 배를 목표로 삼는지, 영화는 적나라한 어투로 말해준다.

폭력,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폭력성’은 이제 일상화돼 있다. 자아가 성숙해져 가는 10대에게 반복되는 폭력은 왜곡된 거울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야만을 바라보고 흉내낸다.

폭력의 극단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살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11월 22일 부산 H아파트 7층에 사는 김모(14ㆍK중1)군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24층 복도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다. 같은 반 친구는 “하루 전날 아버지로부터 담배 피우는 것으로 오해 받아 꾸중을 들은 것에 시무룩하던 김 군이 방과 후 아파트 24층으로 함께 올라가자고 하더니 말릴 사이도 없이 올라가 뛰어 내렸다”고 했다.

이틀 전인 20일 오후 9시에는 인천 모 고등학교에서 이 학교 2학년 이모(17)군이 5층 교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평소 내성적이었던 이 군은 4월부터 학교 영어 교사 안모(27)씨와 영어 공부를 주제로 e 메일을 1주일에 3~4통씩 주고 받아오다 “선생님이 누나 역할을 해 달라”는 등 친밀감을 표시해 왔다. 내심 부담스러워 진 안씨가 9월 답장을 끊고 냉랭하게 대하자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출구 없는 곳으로 내 몰린 10대

“한곳으로만 내모는 출구 없는 사회에서, 극단적 대처는 우리의 10대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그것은 온갖 매체와 실생활이 온 라인과 오프 라인으로 폭력에 무감각한 10대를 양산해 내고 있는 데 따른 당연한 결과다.”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협의회’(대표 고성애)가 11월 20일 발표한 학교 폭력 실태 조사 결과는 현실을 잘 말해준다. 이 조사는 서울시내 474개 초ㆍ중ㆍ고교의 생활 지도 교사를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조사 학생의 9.5%가 학교 폭력이나 집단 따돌림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이 보편적으로 맨 처음 대하는 학교 폭력은 금품 갈취-신체 폭행-따돌림-폭력 서클 가입 강요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학교가 학교 폭력의 취약 지대로 나타났다.

1,682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펼쳐졌던 이번 조사에서 9%의 학생들이 ‘폭력 피해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는 대답을, 30%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남을 괴롭히는 행동에 가담했다’고 답했다. 최근 1년간 가담한 학교 폭력의 유형에 대해서는 23.4%가 집단 따돌림을 꼽았다.

그 밑으로는 공공기물 파손(23.9%), 금품 갈취(6.9%), 단독 폭행(8.6%), 타 학교와의 패싸움(6.8%), 집단 폭행(14.6%)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왜 자신과 직접 연관이 없는 사람에 대한 가해 활동에 동참했을까?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35.7%), 장난 삼아서(15.5%), 아무런 이유 없이(15.3%) 등 모호한 이유가 대부분이다. 친구 폭행에 동조해(7.8%),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7.6%), 친구나 또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3.2%) 등 폭력의 조직화를 암시하는 대답의 비중도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려고’라고 답한 청소년이 전체의 3.9%에 달해 사태가 만만치 않음을 일깨워 준다.

‘왕따’, 즉 집단 따돌림 현상은 정상적 환경의 청소년도 또래 집단으로부터 맨 처음 경험할 수 있는 폭력이다. 외형적 폭력이 동반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한 학생에게는 심각한 심리적 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최근 부쩍 주목 받고 있는 사회적 문제다.

한국교육개발원(원장 이종재)은 11월 15일 ‘초중학생 시기의 왕따 현상과 대책’이란 제하의 보고서를 발표, 학부모와 교사 사이의 이해와 협조가 해결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학생들이 ‘왕따’를 모면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하는 일들의 내용은 그 폐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따돌리고 싶지 않은 친구 따돌리기에 동참하기, 빌려주기 싫은 것 빌려주기, 숙제나 심부름 해 주기, 시험 답안지 보여주기 등 성인의 세계를 뺨치는 갖가지 부당한 일들이 10대의 일상을 위협한다.

따돌림 현상은 친구가 전혀 없는 외톨이 학생이 겪는 ‘왕따’와 소수의 친구가 있는 ‘따’로 나뉘는데, 특히 초등학교 상급학년 이상의 아이들일수록 학부모와 교사의 적극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연구진은 강조한다. 이번 조사는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 6학년 6개 학급과 중학교 2학년 6개 학급 등 모두 500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폭력 만연, 도덕적 아노미 현상 심화

청소년보호위원회(위원장 이승희)가 11월 19일 발표한 ‘청소년 유해 환경 접촉에 관한 실태 조사’ 결과는 10대의 일탈적 행위에 관한 현황을 일러준다.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청소년 1만4,369명 중 음주 경험자는 70.5%로 1999년 보다 10% 포인트 증가했으며, 20%가 실제 성 관계 등 성접촉 경험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의 섹스 도메인에 접속해 음란물을 본다는 청소년은 전체의 52.4%였다.

“누구나 한번쯤 자살 사이트나 유해 사이트 등 정서에 올바르지 않은 사이트에 한번쯤 접속해 보았을 것입니다. 인터넷 접속량과 접속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성격에 많은 변화가 오고 주위 사람들과 멀어져 갔어요. 이런 유해 사이트가 없어지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소년보호위원회와 한국사이버감시단(단장 공병철)이 9월 10일 정부중앙청사에서 벌였던 ‘청소년이 뽑은 유해ㆍ폭력 사이트 선정’ 대회 시상식에서 최고상을 받은 안성배(15ㆍ수지고1)군의 소감이다. 이 자리에서 안 군은 “섹스와 폭력을 주제로 한 도메인에는 약속이나 한 듯 성인 인증 제도가 없다”고 덧붙였다.

사회에 만연한 폭력성은 자라나는 10대에게는 도덕적 아노미 현상으로 귀결된다. 그들에게는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가 개방되고, 패러디란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뒤틀 수 있게 된 그들은 기성 세대의 약점과 구린 구석을 보고 있다.

반부패국민연대/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회장 고건)가 9월 전국 12개 도시의 중고교생 3,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부패 인식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7.3%는 ‘문제가 생길 경우 뇌물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답했다. 나아가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10억을 벌 수 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고생은 16.8%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들 중 41.5%는 부정부패를 고발한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 있다는 답을, 35%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들의 부패를 묵인하겠다는 답을 해 기성 세대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을 왜 그러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14.3%)는 데서, ‘그런 자들은 적극적으로 왕따를 시켜야 한다’(5.7%)는 답까지 나왔다.

지금 10대는 사회의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에 대한 전통적 구분이 완전 해체된 양상을 보여준다. 또 부패 정도를 묻는 대목에서는 정치권-언론계-기업-법조계-교육계-공무원-금융계-경찰의 순으로 꼽았다.


사회가 문제아를 만든다

2000년 5월 잠든 부모를 망치로 때려 죽인 뒤 사체를 절단해 유기한 이은석이 우리 사회에 준 충격에서 한국 사회는 과연 어느 정도 배웠나. 고려대 2학년생인 은석이 부모를 살해-해체-유기한 사건은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니다.

교도소 수감 중인 이군을 면담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꼼꼼한 보고서를 펴낸 연세대 심리학과 이훈구 교수는 “과도한 입시 경쟁, 부모 자녀 간의 갈등, 부부 간의 갈등, 가정 폭력, 학원 폭력, 각종 미디어 폭력, 인터넷 중독 등이 사건의 총체적 배후”라고 결론지었다.

당시 이군이 수감돼 있던 안양교도소에는 이군 외에도 부모를 죽인 재소자가 10명 더 있었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 한 줄은 이른바 문제아들이 절실히 바라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해준다. “출세한 삼촌들 중 하나라도 나를 머라캤으면(꾸중했더라면) 내가 이래(이렇게) 빗나가지는 안 했을 끼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2/0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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