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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김현식(上)

치열한 삶을 살다 간 반항아

포효하는 목소리로 세상의 모든 사랑의 고통을 껴안은 듯 울부짖으며 노래하다 요절한 김현식. 1990년 11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벌써 12번씩이나 겨울 전령이 방문했다. 어느 후배의 상갓집에서 민족을 이야기했던 김민기와 일촉즉발의 한판대결을 펼친 그의 치열한 사랑의 노래들은 연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불멸의 연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그는 중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나이부터 통기타를 끼고 종로 등지의 생맥주 집을 돌아다녔다. 대부분 20대였던 가수들과 어울리기 위해 항상 나이를 몇 살을 높여서 둘러댔다. 그는 실제 1958년 1월 7일 잡다한 소규모 사업을 벌였던 부친과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부모의 2남1녀 중 둘째로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남달랐던 그는 동네아이들과 숱하게 싸웠다. 1965년 혜화초등학교 입학식 날도 그는 어김없이 학교 뒷마당에서 고학년 선배들과 피투성이로 나뒹굴며 한판 싸움을 벌였다.

1966년 춘천 성심여대를 다녔던 사촌누나가 학교 보일러실 굴뚝으로 투신자살을 했다. 경기여고를 나온 미모의 미모의 여대생 자살은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남자관게에 의한 자살이라는 소문이 난무하며 염세적인 문학소녀의 자살로 언론에도 크게 실렸던 이 사건은 어린 김현식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서울에서 함께 살면서 끔찍하게 좋아했던 사촌누나의 돌연한 자살은 열 살도 되지 않은 그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이후 평생을 사랑과 삶, 죽음의 문제들에 대한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쳤던 원초적 콤플렉스는 그의 노래 전반에 걸쳐 녹아 들었다. 3학년 때 그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충북 옥천의 죽향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이 시절 그가 경험한 학교 뒷산의 대나무밭 소리, 옥천 한쪽을 감아 흐르던 맑은 금강,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던 옥천 아이들과 강가에서 싸우던 일, 집안에서 운영하던 갈포공장의 높은 굴뚝 등은 어린 시절의 아름답고 소중한 이미지로 가슴속에 담겨졌다.

4학년때 그는 6학년에 재학중이던 전인권이 다니고 있던 서울 삼청초등학교로 다시 올라왔다.

1971년 전교 4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보성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정릉에 있던 큰집에서 사촌 형제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때 홍익대 공대에 재학중이던 사촌형 양국정은 그에게 음악을 전파해준 메신저였다.

학교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며 음악활동을 했던 양국정은 김현식의 첫 기타 선생님이었다. 김현식은 곧 박인수의 '봄비', 비틀즈의 '오 달링', CCR의 '프라우드 메리' 등을 그럴 듯하게 뽑아내며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에 빠져드는 강도만큼 공부도 잘했던 모범생은 공부보다는 기타나 스케이트를 메고 다니는 사고뭉치로 변해갔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간장공장이 망해 집안이 어려워지면서부터느 ㄴ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일 만큼 반항아로 전락했다.

중3이 되면서 고교 진학을 위해 다시 책을 잡았지만 무리하게 지망한 경기고에 낙방을 하고 후기 명지고에 진학해 밴드부에 들어갔다. 어느날 선배의 악기를 만진 죄로 혼내는 선배들과 한판 싸움을 벌인 후 밴드부에서 쫓겨났다.

학교에 흥미를 잃은 그는 1학년을 마치기 전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이후 종로 제일검정고시학운을 다녔지만 공부보다는 종로 통의 꼬마 깡패들과 어울리며 통기타를 치며 야간 업소들을 제 집 드나들 듯 출입했다.

기타를 치며 유행 곡들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장발의 아마추어 가수들이 눈에 박혀왔다. 가수가 되려는 결심을 한 그는 집에 틀어박혀 노래연습에 몰두했다.

'벌판'이라는 작은 업소의 오디션에 참가했다. 잔뜩 긴장을 하고 호세 펠리치아노, 비틀즈, CCR 등의 노래를 불러 OK 사인을 받아냈다.

그는 "출연료도 없이 지배인 기분에 따라 차비 몇 푼씩 받는게 고작이였지만 매일 무대에 올라 노래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생전에 술회했다.

무명가수생활을 시작한 김현식은 종로의 '벌판'에서 명동의 '셀부르', '썸씽'등 큰 무대로 활동반경을 넓혀나갔다.

이즈음 그는 두살 연상인 연세대 철학과 여대생과 첫사랑에 빠져 실연을 겪기도 했다. 그녀와의 이별의 공백을 그린 노래가 데뷔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 이다.

밤무대를 전전하던 어느 날 이장희와 친동생 이승희가 듀엣을 제의해 와 이름도 없이 듀엣을 결성했다. 송창식, 이장희 등 스타 가수들의 무대 사이를 잇는 둘러리 역할이었지만 국도호텔 나이트클럽에 출연기회를 잡았다.

1976년 김현식의 노래실력응 눈여겨보던 이장희가 다가왔다. 의류매장을 운영하면서 사직동 아이템풀 학원 지하에 연습실을 차려 가수들의 앨범취입을 돕던 그는 김현식을 테스트했다. 뛰어난 감수성과 호소력 강한 보컬에 가능성을 느낀 이장희와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기쁨에 들뜬 김현식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밤잠을 설쳐가며 녹음작업에 임했다. 하지만 녹음을 끝내고 음반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이장희가 사업부도로 미국으로 도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식 가수데뷔의 달콤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8개월 간 구속됐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12/0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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