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안과 밖] 빛의 자식과 어둠의 자식

“로마시대 귀족의 아들인 줄리어스 시저는 민중파에 참여했고, 존 F 케네디는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당 소속이었다."

부자도 서민적이고 개혁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의원의 이야기다. 돈과 명예를 다 쥔 그가 권력의 최정점인 대통령 선거에 나선 것에 일종의 알레르기반응이 우리 안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의 말대로 부자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거다.

문제는 거듭된 총리서리의 부결에서 봤듯이 가진 자들의 부패가 문제다. 이점은 이회창과 노무현의 양강 구도로 치러질 올 대선에서 ‘귀족 대 서민’이라는 하나의 대결현상을 낳고 있다.

왕정이 아닌 우리나라에 세습귀족은 없다. 그런데 웬 귀족? 문제는 귀족이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또 다른 특권층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돈을 통해 새로운 특권을 낳게 되고 그것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서민은 어떤가. 기회의 균등이 자본주의와 민주사회의 토대다. 하지만 기회의 박탈과 불평등으로 꿈을 이루는 게 어려워진다.

즉, 옛날 계급사회처럼 신분상승이 힘들어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부와 명예와 권력의 세습유무다.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는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인생의 축소판인 스포츠는 어떨까. 월드컵 후 독일 진출에 성공한 축구선수 차두리를 보자. 한국의 최고 스포츠스타 중 한명인 차범근이 그의 아버지다. 지난 한·일월드컵에서 아버지를 이어 월드컵무대에 섰던 그다. 그러나 대표팀에 뽑힐 때 아버지의 후광과 특혜가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사실, 바로 실전투입용이라기 보다는 잠재력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차두리 말고 잠재력의 선수는 많았다. 그러나 그가 선택된 이유로 그의 ‘스포츠 귀족’이라는 배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출발선이 같지 않은 ‘플러스 알파’를 가진 그다.

또 다른 경우로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배리 본즈’를 보자. 공격 수비 주루 3박자를 완벽하게 겸비한 최고의 메이저리거를 꼽으라면 단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다. 이런 그도 자이언츠의 간판스타였던 바비 본즈가 아버지인 ‘로열 패밀리’출신이다. 켄 그리피 주니어(신시내티 레즈)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2세 선수’다.

올해도 아론상 수상으로 최고의 타자였던 그지만 작년 2001년은 본즈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새긴 해였다. 시즌 초반부터 무섭게 홈런포를 가동한 본즈는 2001년 10월 6일 ‘코리언특급’ 박찬호를 상대로 시즌 71호 홈런을 쏘아 올리며 메이저리그 홈런 역사를 다시 썼다. 이어 그해에 자신의 통산 4번째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가진 자에 대한 시기인가. 지난 해 신기록 작성행진 중 현지 분위기는 맥과이어가 기록 행진을 벌이던 1998년에 비해 훨씬 미지근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본즈의 이기적이고 모난 성격 탓이 크다고 한다.

그는 팀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다. 경기 전 함께 몸을 풀거나 클럽 하우스에서 어울리는 일도 거의 없다. 개인적인 자질 문제이기도 하지만 든든한 아버지의 후광을 얻고 탄탄대로를 걸은 그의 엘리트의식에서 나온 특권의식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빛의 자식과 어둠의 자식

스포츠가 몸을 갖고 경쟁을 하지만 타고난 배경이 ‘플러스 알파’로 작용한다면 그 결과는 예정돼 있는 게 아닐까. 월드컵 후 한껏 부풀어 올랐던 한국축구선수들의 유럽진출 꿈은 대부분 꿈으로 끝났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같은 내용을 놓고 볼 때 차두리의 독일진출은 기대이상의 결과였다.

그 안에는 차범근 아들이라는 프리미엄을 무시할 수 없다. 차두리가 기본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도 그의 유럽진출은 아버지의 힘이 컸다. 다른 선수들이 에이전트 능력부족 등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차두리에게는 어느 에이전트보다도 막강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범근이 독일에 뿌린 명성과 인맥은 차두리의 보증수표 역할을 했다.

월드컵 신화로 ‘신(?)’의 반열에 오른 김남일을 보자. 극명한 대조가 될까. 어찌 보면 지금 정치권의 귀족 대 서민 구도 속에서 서민의 이미지가 그다. 반항적이고 돌발적이며 솔직한 그의 행동과 말은 열화 같은 지지를 받았다. 바람이었다. 든든한 집안의 배경은 고사하고 그의 축구실력 자체도 인정받지 못한 선수였다.

지연과 학연의 영향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 뿐만은 아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히딩크였기에 가능한 새로운 인재풀의 실험은 김남일을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식’으로 끌어올렸다.

여기서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귀족은 나쁘고 서민은 좋다는 주장은 아니다. 스포츠 안에도 분명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있는 이런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과 그것을 해결 해야 할 몫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스포츠는 이제 단순한 신체움직임을 넘어서 산업과 사회의 영향세력으로 성장했다. 월드컵으로 부쩍 우리 귀에 익은 월드컵 경제효과라는 표현과 월드컵 성공과 대권을 연관시키는 움직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는 스포츠다. 스포츠가 승패를 가르는 아름다운 경연장인 것처럼 이곳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은 그들의 땀의 대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스포츠가 꿈의 구연장이라고 볼 때 어디에선가 땀을 흘리며 달리는 많은 선수들이 꿈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기를 바란다.

또한 배리본즈의 경우처럼 로열패밀리의 선수든 아니든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가 가진 의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스포츠스타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형진 스포츠칼럼니스트·임바디 대표

입력시간 2002/12/0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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