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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김현식(下)

허무를 앓다 떠난 사랑의 가객

김현식의 노래는 4년이 지나서야 세상 빛을 보았다. 음악적 노선이 정립되지 않았던 이 시절, 그는 맑은 미성으로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였다.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김현식은 실망보다는 자신의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에 행복해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밤무대의 현란한 조명에 빠져들고 쉽게 술과 대마초에 취해버린 그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매일 새벽 고독감에 몸을 떨었다.

이대 앞 옷가게‘주인아가씨’였던 김경자는 이 당시 큰 위안과 삶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결혼 후 동부이촌동의 공무원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외아들 완제를 얻고 아내와 함께 피자가게를 운영했던 이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밤에는 그룹 ‘검은나비’의 리드싱어로 명성을 날리며 방미에게 ‘주저하지 말아요’라는 히트곡을 작곡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 TV에서 민해경과 같이 팝송을 부르는 김현식의 가창력을 눈여겨본 동아기획은 그를 스카우트해 동부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서 2집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녹음장면을 지켜보았던 조원익은 “대단했어요. 무언가 다른 음악이었죠. 아무런 절제도 없는 그야말로 생음악 같은 노래였는데 거칠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다“고 회고한다. 1984년 9월 2집 ‘사랑했어요’가 발표되자 방송보다는 음악다방, 나이트클럽 등 다운타운 가에서 “도대체 어떤 가수냐”며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의 앨범 이후 발표된 전인권의 들국화는 더욱 큰 폭풍을 몰고 왔다. 동아기획의 모든 홍보기획도 들국화 위주로 짜여지며 김현식과 전인권 사이엔 묘한 애증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그는 조원익이 리드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에 이어 정성조의 ‘메신저스’에 들어가 밤무대 최고의 가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85년 김현식은 절친한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장기호, 그리고 요절가수 유재하와 함께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했다. 음악적 명성이 쌓여갔지만 아내와 별거에 들어가면서 사랑하는 아들과도 헤어져 살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해주던 누나가 결혼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버려 그는 극심한 인간적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정신적 방황의 시절, 그는 김광민의 상가에서 현실 참여적 포크로 대학가를 주름잡던 김민기와 음악의 주제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일화를 남겼다.

김현식은 ‘사랑’이, 김민기는 ‘민족’이 가장 소중한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3집의 수록곡 ‘비처럼 음악처럼’은 30만장이상이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2, 3집의 연타석 히트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음에도 김현식의 얼굴을 TV에서 만나기란 어려웠다. 그는 계산된 기획에 의해 움직이는 방송의 속성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얼굴 없는 가수’로 통했다.

3집까지 특별한 음악적 성향 없이 혼재된 어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담았던 그는 신촌블루스의 이정선과 엄인호를 만나면서 블루스로 음악적 색깔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노래 중간에 제 흥에 겨워 외치는 애드립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보컬도 탁해졌다.

신촌블루스와 두 장의 앨범과 몇 번의 콘서트를 같이했다. 이 당시 선보였던‘골목길’,‘이별의 종착역’등은 음악적으로 물이 오른 그의 노래의 정수를 맛보게 해준다. 87년 전인권 허성욱 등 들국화 멤버들과 함께 그는 다시 대마초 상용혐의로 구속되었다. 5개월 후 88년 2월 삭발을 하고 오른 63빌딩 컨벤션센터 공연은 절치부심한 재기의 무대였다.

그는 ‘언제나 그대 내곁에’등이 수록된 4집을 9월에 발표했다. 그리곤 88년 말 음반판매량이 가장 큰 음반을 발표한 가수에게 수여되는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가수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밤샘 녹음, 폭음, 줄담배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건강악화를 불러왔다. 병원에 실려 가는 횟수가 늘어가며 김현식의 최후가 다가왔다. 90년 3월 생전의 마지막 앨범인 5집 ‘넋두리’는 허무감이 짙게 깔린 거칠고 처절한 이 때의 음성을 담은 음반이었다.

이후 강인원이 주도한 영화음악 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참여, 전국 순회 라이브콘서트를 열었다. 복수로 올챙이배처럼 튀어나온 배를 움켜쥐며 꺼져 가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무대에서 불태웠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사랑과 평화의 김이철, 김명수와 함께 그의 유작 앨범인 6집 녹음에 들어갔다. 항상 취해있던 김현식은 음반작업을 마쳐가던 11월 1일 오후 5시 20분 자택에서 간경화로 쓸쓸하게 세상을 등졌다. 김현식의 요절은 오히려 생전보다 더 큰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몰고 오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켜 화제가 되었다.

성남의 공원묘지에 안장된 그의 49재 겸 노래비 헌정식에는 수많은 동료가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배 소울 가수 박인수가 긴 헌정사를 낭독했다.

사실 그는 후배들에게는 무척 상대하기 힘든 괴팍한 선배였지만 91년 2월 그를 그리워하는 김수철, 이정선, 최이철 등 30여명의 선후배가수들은 그의 음악을 기리는 추모콘서트와 앨범을 발표했다. 김현식은 사랑을 노래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다 떠난 사랑의 가객이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12/0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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