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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실장 박상국

"보물과의 숨바꼭질은 쾌락"

“제 행색을 흘끔 보더니 방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면 머슴 쓰던 방이 있는데 그거라도 쓰겠다면 쓰라구요. 가보니 온통 거미줄에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더라구요. 그래도 고맙다 생각하면서 열심히 걸레질해서 닦고 들어가 잤죠.”

박상국(56)씨의 ‘옛날 이야기’다. 20여년 전 어느 절에서 겪은 일,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제가 경판들을 정리하는 솜씨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갑자기 옆에 와서 ‘손님, 다른 방으로 옮기세요’하더라구요. ‘서울에서 오기로 했던 신도가 안 온다고 연락이 왔다’나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지요. 하하 “


국내 불교ㆍ서지학의 1인자

박씨는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이자 국내 불교ㆍ서지학의 1인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문화재 감정위원 등의 경력을 거쳐 그동안 그가 보인 ‘최초’ ‘최고’ 기록도 많다.

국내 처음으로 전국 사찰의 경판들을 총조사, 최초의 분류표를 만들어낸 저력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이를 통해 굵직한 연구 결과물들을 수 차례 쏟아내 관련 연구의 발판을 다져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국보와 보물을 지정한 수로도 최다 기록을 갖고 있다.

박씨는 1976년 동국대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 약 30년간 이 길을 걸어왔다. 어렸을 적 철학자나 사상가를 꿈꿨던 그는 중학교 때 별명이 ‘소크라테스 2세’였다. 괴짜 짓도 숱하게 벌였다.

고등학교 시절,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소식으로 세계가 떠들썩했을 때 이 줏대 있는 대철학자에게 반한 나머지 5일간 수업도 무단 결석한 채 혼자 도서실에 틀어박혀 ‘존재와 실존주의’에 대한 글을 쓴 전력도 있다.

“문제아 아닌 문제아였어요. 어쩌면 우리 집안 분위기 자체부터가 좀 별난 영향도 있었을거예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부도가 났는데 그 후에도 석유에서 박하를 추출한다며 아버지는 날마다 제 화학책 등을 가져다 놓고 화학실험을 하다가 수시로 뭐가 뻥뻥 터지고는 했어요. 남들이 보면 정말 웃기는 집이죠.(웃음)”

‘파란만장’한 4수 끝에 친구의 권유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 대학 2학년 때부터는 비어있던 한 교수의 연구실을 넉살좋게 통째로 빌려 쓴 ‘연구실을 가진 대학생’이기도 했다.

대학원 시절, 박씨의 남다른 데뷔가 있었다.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아무도 행방을 몰랐던 연담 스님의 주술서 ‘사기’를 박씨가 동국대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발견해 당시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화제가 되었다.

어느 책의 뒷 갈피에 숨듯이 끼워져있어 그때까지 그런 자료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몰랐던 일이었다. 무엇이든 예사로 보지 않는 박씨의 첫번째 ‘보물찾기’의 성과였다. 주변에서는 ‘부처님의 가피(可被)를 받았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논문의 발표 얼마 뒤 박씨는 한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서 그와 똑같은 목판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정말 머리가 띵 했어요. 내가 이제껏 사상누각을 지었구나, 원판이 따로 있는데 그걸로 찍어낸 종이를 찾아낸 것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더구나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제가 발견한 것에 불과하구요. 하던 일을 잠시 접고라도 당장 기초조사부터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서지 연구가 그렇게 시작된 셈이지요.”

1976년, 문화재관리국에 채용돼 당시 임시고용직인 문화재2과 전문요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맨 처음 맡겨진 일은 문화재 전문위원들을 모시고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불상, 탱화, 서적 등 동산문화재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 최초의 사건이 계룡산 갑사에서 있었다. 원래 그는 갑사를 조사하며 주지실에 고이 모셔져 있는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 판목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곳을 잇따라 둘러보던 중 법당 뒤편에도 그와 비슷한 목판들이 쌓여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예정된 조사가 모두 끝나고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법당 뒤편의 목판들은 내내 박씨의 마음에 미심쩍게 남아 있었다.

출장 후 하루의 여가가 생기자마자 다시 갑사로 찾아간 박씨. 기어코 법당 뒤 목판더미를 꼼꼼이 확인한 끝에 묻혀 있던 월인석보 16장을 추가 발견해내는 개가를 올렸다. 이 일을 계기로 전국의 사찰 문화재를 전면 검토하는 총조사가 박씨의 역설에 힘입어 본격 추진되었고, 장장 1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자료집 ‘전국사찰소장 목판집’이 박씨의 땀과 함께 1987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고팔픈 경판 찾기

길고 고달팠던 현장 조사작업. 길게는 한 절에 40~50일씩 묵는 때?많았다. 늘 꾀죄죄한 작업복 차림에다 손에는 탁본에 쓸 먹이며 종이 등 짐이 한가득, 초라한 행색 때문에 본의 아니게 초면에 애꿎은 홀대를 받는 등 별별 일을 다 겪었다.

경내에 흩어져 있는 경판을 찾아 모으는 것만도 큰 일거리였다. 눈에 보이는 곳은 물론, 2층 다락방이나 불단 밑에 거미줄을 감고 있는 경판까지 숨바꼭질을 하듯 찾아 꺼냈다. 그 양이나 무게도 만만치 않아 어떤 것은 꺼내는 데만 하루종일 걸리는 것도 있었다. 찾아낸 경판들을 일일이 먼지를 털고 닦는 사이 목이 매캐해 침을 뱉으면 새까만 가래가 튀어나왔다.

각 경판마다 직접 사진을 찍고, 탁본을 한 다음 다시 이를 내용별로 분류하느라 한바탕 비지땀. 경판마다 순서를 잡아 정리 기록하고, 각 경판에 고유 타이틀을 붙이는 등 할 일들이 계속 쏟아졌다.

그가 풀어낸 역사속의 수수께끼들이 모두 이러한 기초작업을 거쳐 탄생했다. 머슴 방 신세부터 져야 했던 그 절에서도 처음에는 ‘가진 것이라곤 금강경 경판밖에 없다’는 스님의 말씀과는 달리 박씨의 조사 후 26종의 경판이 더 발견되었다.

“얼마나 고된지 밤에 잠을 잘 때도 허리 뒤에 팔을 받치지 않으면 도저히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10시간쯤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풀리지도 않구요. 그래도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버틸 수 있었지요. 이 일을 다 마치고 나니 그때부터 우리나라 고판본에 대한 책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구요. 웬만한 내용들은 이미 다 알겠더라구요. 그 일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기본이 쌓인 거지요.”

활약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조사기간중인 1980년 ‘전문위원’으로 전격 승급, 그 후에도 많은 일을 벌였다. 그중 해인사 대장경판의 베일을 벗긴 이야기. 언젠가 해인사 대장경판에 대한 용역조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 정작 매주마다 올라오는 그 실태보고서를 제대로 검토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보고 박씨가 그 일을 자청했다. 그런데 그간의 보고서를 모두 모아 검토하다 보니 적쟎은 오류가 눈에 띄었다. 자신이 한번 조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박씨. 마침 그는 당시 어렵사리 제작된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운좋게 구해 한 질을 갖고 있었다. 그것으로 대장경판에 대한 간행기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논점이 된 사안중 하나는 대장경 제작기간에 대한 문제였다.

“그 때까지 알려져 있기로는 대장경을 만드는데 16년이 걸린 것으로 돼 있는데, 제가 조사해 보니 아무리 봐도 12년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거 뭔가 잘못됐구나, 12년인데 왜 계속 16년이라고 한 걸까 이상한거지요. 그런데 아무리 크로스체크를 해봐도 12년이지 16년이라고 나온 기록을 볼 수 없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역사서를 거꾸로 읽어서 생긴 오류더라구요.”


해인사 대장경판 베일을 벗기다

단적으로 혼란을 부른 부분은 ‘왕이 성문밖에 있는…(중략)…향을 올렸다. -고종 38년(1251년)’이라는 기록이었다. 이중 ‘향을 올린’ 의식을 일본 학자들이 대장경 완성시점으로 오독하면서 시간을 역산해 제작기간 총 16년으로 추정한 것.

이에 대해 박씨는 언급된 왕의 즉위 배경 등 언뜻 보기에는 별 상관도 없을 듯한 전후의 역사적 상황까지 철두철미하게 꼬리를 물고 기록들을 쫓아다니며 확인한 끝에 이같은 추정이 잘못된 것임을 밝혀냈다.

“다 일제의 영향 때문입니다. 일본 학자들의 말만 믿고 우리 스스로 자체 조사도 한번 제대로 안해 보고 무조건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다가 그들의 실수까지 그대로 옮긴 거지요. 그때만 해도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재탕, 3탕 하던 것이 현실이었거든요. 또 일본인들의 논문은 그 자체로 워낙 논리가 치밀해 더욱 그러기가 쉬웠구요.”

대장경의 산실중 하나로 알려져 있던 강화 선원사가 실제로는 대장경이 만들어진 곳이 아님을 밝혀내기도 한 박씨. 이것 역시 경판 분류표와 분류표, 기록과 기록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뒷추적을 벌인 결과다.

대장경의 제작 장소를 알아내는 데만도 심지어 경판에 새겨진 각수(刻手)의 이름, 동일 각수의 작품 분포와 제작 장소, 시기 등 수시로 분류 항목을 바꾸어 가며 치밀하게 분석, 열쇠를 끌어냈다. 1983년에 박씨는 이를 학계에 정식 발표했다.

이밖에도 한때 중국이 뜬금없이 자신들의 것이라 우겼던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 다라니경에 대한 시비 등 구구절절 역사추리소설 같은 박씨의 지난 이야기를 못 다 싣는 것이 아쉽다. 참고로, 누구든 그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최소한 하루쯤은 통째로 시간을 비워둔 뒤 약속하기를 권한다. 이야깃거리도 많지만, 대화 도중 수시로 책장 사이를 오가며 관련 기록들을 상대의 코앞에 들이대는 그의 열정때문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토ㆍ일요일이 없는 생활만 15년간 했습니다. 몸은 피곤해도 막상 내가 찾던 것을 마침내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란 ‘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이 가슴에서 막 용솟음칩니다. 아주 대단한 쾌락이지요.”


"우리문화 원형 복원하고 싶다"

박씨가 예능민속연구실로 옮겨온지는 약 9년째다. 이곳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의 기록조사 등의 작업을 중점적으로 맡고 있다.

한편으로는 역시 그의 주도로 시작된 해외전적조사도 12년째 함께 진행되고 있다. 해외에 유출돼 있는 우리나라의 고서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내년에는 중국에서 조사가 이뤄질 예정이다. 지난 일본 전적조사때도 꽤나 먼지를 마셔대 혼이 났던 박씨다.

말은 어눌해도 한번 일을 벌이면 바위처럼 무서운 사람. 우연인지 내력인지 박씨가 있는 예능민속연구실은 내부에서도 ‘야근하는 부서’로 익히 악명이 나 있다. 일 욕심으로 보자면 56세라는 그의 생물학적 나이도 어쩐지 허풍같다.

“시대가 급변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루빨리 되찾아 그동안 변질돼있던 우리 문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싶습니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걸린 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구소의 역할과 할 일이 그만큼 큰 거겠지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s10@chollian.net

입력시간 2002/12/0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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