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즐겁다] 대성리

추억의 자리를 붙잡고 북한강으로 간다

겨울 북한강엔 추억이 있다. 기차 타고 MT가던 젊은 날의 치기와 첫사랑의 설렘. 삶이 힘겨울 때면 넉넉한 강물에 기대어 노여움을 풀던 기억이 새롭다. 북한강엔 언제나 겨울을 녹이는 낭만이 흐른다.

청량리역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50분. 마석역을 떠난 기차가 새터로 접어들면 소복단장한 화야산과 북한강이 차창에 어린다. 이때쯤이면 군사독재정권 아래 암울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386세대는 정태춘이 부른 ‘북한강에서’를 떠올릴 테고, 이제 막 스물을 넘긴 ‘꽃띠’라면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흥얼거릴 것이다.

무엇인들 어떠랴. 대성리를 찾는 이들 모두 부푼 풍선처럼 서울을 탈출한 해방감에 들떠 있으면 그만일 뿐.

기차는 대성리역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내려놓고 떠났다. 배낭 하나씩 둘러멘 젊은이들은 눈밭에 쏟아지는 햇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총총 어딘 가로 몰려간다. 여행문화가 전무하던 1980년대. 서울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인 대성리는 대학생들의 ‘엠티(MT)’ 천국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젊은이들은 대성리를 찾는다. 이까짓 추위쯤은 아랑 곳 없다는 듯 눈밭을 지치고 달리며 젊음을 마음껏 토해내고 있다.

강의 가장자리를 따라 얼었던 얼음이 깨지면서 북한강은 참았던 숨을 터억 토한다. 긴긴 겨울 밤을 지새고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젊은 날의 추억을 혼자만 간직하기가 숨막혔던 것일 게다. 옛사랑을 흘려보내고,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분노도 띄워 보냈던 강. 그 숱한 번뇌와 고민을 끌어안고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언제나 너그러웠던 강.

겨울 대성리에서 만난 ‘청춘’들은 경박스러울 만큼 당당하다. 타인의 시선은 아예 무시하고 과감하게 애정표현을 한다. 그들을 뒤로하고 북한강 상류로 거슬러 가면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숲길. 대성리로 MT를 왔던 이라면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그 길이다.

엠티 열기에 휩싸여 꼬박 밤을 지새고 맞은 새벽. 물안개 자욱한 강변을 거닐다 서툴게 입맞춤을 한 후 어색하게 강물만 바라보던 시절. 첫 키스의 주인공이 사라진 빈자리엔 허수아비만 기우뚱하게 서 있다. 우리들의 한시절도 저 흐르는 강물처럼 먼 기억 속으로 사려져 점점 희미해져 간다.

벽난로 속의 달구어진 불꽃처럼 붉은 해가 강을 건너 서산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대성리 호반의 이 끝과 저 끝이 모두 담긴 카페 ‘로마의 휴일’ 유리창으로 노을이 뚝뚝 떨어진다. 강 건너 대성리에는 저녁놀이 떨군 불씨가 가로등으로 피어난다.

아름다운 카페들은 모두 강 건너에 있다. 청춘들이 온 몸 부서져라 부딪치고 밤을 새워 악을 쓰던 그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어쩌면 그 추억의 한 가운데로 성큼 다가가는 것을 낯설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저 바라보는 자리를 찾아 드는 것일 게다.

삶은 때로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살아질 때가 있는 법이란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중심보다는 주변을 찾아 중심을 바라보려 한다.

경춘가도를 질주하는 차들이 내뿜는 불빛의 행렬. 그 불빛이 달려가는 서쪽 어딘가에 정태춘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의 도시’가 있을 것이다.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과 옛 추억에 흠뻑 취한 사내 하나. 강 건너엔 밤 열차가 긴 꼬리를 끌고 기적도 없이 대성리역을 향해 미끄러져 온다.


  • 대성리 길라잡이
  • 청량리역에서 대성리역을 경유해 춘천 가는 기차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첫차 오전 5시25분, 막차 오후 10시30분. 대성리에서 청량리로 돌아오는 막차는 오후11시22분이다.

    자가운전으로 갈 경우 서울에서 구리와 남양주를 거쳐 가는 46번 국도나 구리에서 양수리를 거쳐 가는 45번 국도 이용. 구리에서 양수리를 거치는 45번 국도는 북한강 드라이브의 백미. 대성리에서 가평읍을 향해 가다 청평교를 건너 363번 지방도를 타면 카페촌. 363번 지방도를 곧장 타고 오면 양수리다. 363번 지방도는 굴곡이 심하고 빙판이 많아 운전에 주의해야 한다.


  • 먹을거리와 숙박
  • 대성리에서 강 건너에 있는 로마의 휴일(031-584-6039)은 통유리로 밀려오는 북한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즐기는 카페다. 안심 정식(2만7,000원)이나, 바닷가재 정식(3만5,000원)으로 분위기를 잡을 수도 있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가도 괜찮다. 대성리에 있는 양평해장국(031-585-9681)의 선지해장국은 아침 속풀이로 그만이다. 5,000원.

    대성리역 주변과 청평교 지나 양수리로 오는 363번 지방도 주변에 전망 좋은 모텔이 많다. 대성여관(031-584-0767), 그린파크(031-584-3344), 모비딕모텔(031-585-9229). 평일 3만원, 주말 4만원.

    입력시간 2002/12/09 10:3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