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공작… 도청 생존게임

'국정원 도청자료' 문건… 대권 판세 가를 '태풍의 눈'

“겉으로는 진실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최근 한나라당이 ‘국정원 도청자료’라는 문건을 내놓은 뒤 진행된 일련의 정치권 공방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정원의 도청 의혹에 관한 한나라당의 폭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건은 12ㆍ19 대선을 눈앞에 두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청은 이미 노무현ㆍ정몽준 단일화 등 건전한 모든 선거 이슈를 뒷전으로 밀어낸 상태다. 모두들 도청 문건의 사실여부와 그 폭발력에 주시하는 분위기다.

만약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국정원의 불법도청이 사실이라면 정권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뀔 만한 큰 사건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도 야당에 대한 작은 도청과 그것을 은닉하려 한 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신의 비밀보장은 거의 ‘불가침’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 통신비밀보호법도 우편물의 검열 또는 전기통신 감청을 하거나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과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법은 엄격한 요건 하에 예외적으로 정보기관의 감청을 허용하고 있다.


한나라당, 노후보ㆍ청와대에 직격탄

한나라당은 1일 “국가정보원이 광범위한 도청을 해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 16건을 추가로 공개하고 불법도청의 근절을 위한 국정원법 개정과 국정조사 실시, 대통령 사과 및 관련 책임자 문책, 신 건 국정원장의 해임 및 사법처리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선거유세에 나선 이회창 후보 진영은 “노무현 후보는 공작으로 만들어진 김대중 대통령의 후계자”라고 전제, “노 후보는 김 대통령과 박지원 비서실장, 신건 국정원장에 의해 만들어진 꼭두각시로 스스로 창피한 줄 알아야 하며 사퇴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던지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은 거의 지난 2~3월에 이뤄진 청와대,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 언론사 사장, 일선 취재기자의 통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폭발력이 큰 사안은 역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관련된 것이다.

‘노풍’이 세차게 불던 지난 3월,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정권 핵심부가 노 후보를 조직적으로 지원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해 주는 适獵?의원들간의 통화 내용이다. 그중 한 건만 보자

김원기 고문이 3월 11일 김정길 전 의원에게 “박지원 청와대 특보에게 ‘노무현 후보가 본선에서 이인제보다 경쟁력이 좋을 것 같다’는 청와대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이야기해 놨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되는 게 좋지 않느냐”고 의중을 묻고, 이에 김 전 의원이 ‘동감’이라고 밝혔다.

추가로 폭로된 문건에는 청와대 자료도 있다. 2월24일 박지원 당시 청와대 특보는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의 금품수수 의혹 처리와 관련, 이재신 민정수석에게 “대통령께서 일개 정치 브로커인 도승희 말만 믿고 대가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불구속 상태에서 특검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심경을 말씀하시더라. 사안이 확대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통화한 것으로 돼 있다.

물론 한나라당 것도 10여건이나 된다. 지난 3월 한나라당 내분 당시 이부영 의원이 서상섭 의원, 안상수 의원에게 당내 경선 출마를 언급한 통화내용 등이다.

또 민병준 한국광고주협회장은 3월12일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에게 ‘비판기사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돼 있다. 중앙지 5명, 지방지 3명의 기자들이 김원웅 의원과 자민련 김학원 총무 등과 통화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스스로 도청된 사실을 밝혔다.

“지난 3월 18일 나의 후원회장과 휴대전화로 통화한 내용이 한나라당의 미공개 문건에 나와 있어 깜짝 놀랐다”고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민주당, “정치공작” 강력 부인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사 관계자들은 문건의 내용에 대해 대체로 수긍하지만 민주당 관련자들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후보단일화로 패색이 짙어지자 공작정치를 재현하고 있다”며 한나라당과 김영일 총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등 정면으로 대응했다.

도청 당사자격인 국정원은 신건 원장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한나라당의 문건은 ‘괴문서’로서, 국정원은 불법도청은 일절 하고 있지 않으며 정치공작이나 정치개입도 하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신 원장은 “한나라당이 제시한 문건의 활자체는 국정원에서 사용하는 문서의 활자체와 달라 국정원 문건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국정원에서 이 문서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현재 국가기관중 도감청을 하고 있는 곳은 국정원 검찰 경찰 기무사 등이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이 정치권을 집중적으로 도청했을 가능성은 낮다. 군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기무사가 했을 가능성도 적다. 따라서 언제나 국정원이 의심의 눈길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도 이번 문건을 국정원 내부 제보자로부터 입수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신 원장은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안했다”며 사설팀이 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설팀이 도청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한나라당 관련설을 지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 안팎의 거물급 인물들을, 짧은 기간내에, 동시 다발적으로 도청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 의장은 또 “분명히 휴대전화로 했는데 도청을 당했다”고 밝혔다. 휴대전화를 도청했다면 차량탑재용 도청 장비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장비는 대상자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두면 해당 전화가 발신, 또는 수신할 때 자동감지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첨단 장비는 일반 사설업체가 보유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문건의 내용이 맞다고 확인한 의원들과 기자들의 통화장소는 대부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한나라당 중앙당사 당직자실 및 3층 기자실, 민주당사 2층 기자실이었다. 3동의 건물은 모두반경 500m이내에 들어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지역을 타깃으로 삼아 집중적인 도청을 했다는 추론은 일단 가능하다.


사실여부따라 폭발력 엄청

도청문제는 이미 한나라당과 청와대ㆍ민주당간에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으로 변해가고 있다. 노무현ㆍ정몽준 후보단일화에 따른 선거이슈나 정권교체, 세대교체라는 쟁점도 도청에 의해 밀려났다.

이번 선거의 최대 승부처라는 PK(부산 경남)에서 두 후보가 세몰이를 벌이고 있지만, 승부는 도청문제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갈라질 전망이다. 민주당에선 한나라당이 공식선거운동 돌입 후 초반 판세가 불리하고 부산, 대전 등 일부지역에서 초반 분위기를 다잡는 것이 향후 승패에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대선전략차원에서 도청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분석한다.

뒤집어 말하면 도청문제가 그만큼 폭발력이 크다는 뜻이다. 부산에 간 이회창 후보가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권이 이제는 도청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2/09 11:3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