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지미(知美)정서’를 기다리며

엊그제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살인미국회개와 소파(SOFA)전면 개정을 위한 촛불음악회가 열렸다. 웅웅거리는 스피커 소리에 예의 대선 후보들의 로그송이겠거니 했는데, 어쩐지 느낌이 낯설어 걸음을 멈췄더니 음악회에서 울리는 노랫소리였다.

‘F’자로 시작되는 욕과 살인자 도둑놈 깡패 같은 단어로 뒤섞인 노래는 섬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공원에선 수십명의 젊은이들이 촛불을 흔들며 무대에 선 노래패를 따라 ‘반미’정서를 마음껏 쏟아내고 있었다.

“차선 넘은 장갑차로 차선 밖의 아이들을/ 짓뭉개고도 무죄라니 말이 되나/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도로 위의 들쥐인가/(중략) 탱크라도 구속해! 탱크라도 구속해!”

장갑차량에 의해 찢겨진 두 여중생들의 원혼을 달래는 듯한 가사는 그 처절함으로 참석자들의 가슴을 쥐어뜯었고, 노랫가락에 따라 춤추는 촛불은 한여름 밤의 반딧불이 깜깜한 하늘을 노닐 듯 그렇게 겨울 하늘을 살라먹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먼저 부정과 악의 상징인 어둠을 사르는 저항정신이 떠오른다. 9ㆍ11 뉴욕테러사건 이후 ‘그라운드 제로’(테러현장)에서 열린 촛불 추모제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식이었지만 실제로는 반인륜적 테러에 대한 깊은 저항을 뜻했다.

홀로코스트(대학살) 추모의 날 행사에 촛불이 등장하는 것도 극단적인 인종차별에 대한 항거의 뜻을 담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촛불이 세상을 훤히 밝힌 뒤 스러지는 희생정신이고, 세상의 빛 예수(기독교)이자 부처님에 대한 지극 정성(불교)을 상징한다. 또 절대자에 대한 끊임없는 우러름과 숭배, 정성 등도 그 속에 포함된다.

모으면 모을수록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뿜어내는 촛불이지만 폭력성과는 일정 거리가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의 시위문화에서도 촛불시위는 ‘평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전달력은 화염병이 나는 현장에 못지않다. 7일 저녁 서울 광화문 일대를 밝힌 2만여 촛불 시위대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던진 충격만큼이나 강렬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 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며 한 젊은이가 인터넷을 통해 제안한 촛불시위는 이제 광화문을 넘어 전국으로, 또 미국과 유럽으로 번져나갈 태세다.

촛불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1989년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크리스티안 퓨터 목사가 주도한 민주화 시위다. 혁명의 전통이 없는 독일에서 이 시위는 동독 민주화 운동과 베를린 장벽 붕괴에 기폭제가 됐다. 촛불시위는 그 후 폭력과 분쟁, 억압, 증오가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평화의 이미지를 굳혔다.

유고의 민주화 시위에도, 부패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몰아내는 필리핀의 피플파워에도, 9ㆍ11 테러이후 미국의 아프간 공습에 반대하는 반미ㆍ반전 시위에도 촛불이 등장했다. 유신독재에 항거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70년대 명동성당 앞에서 벌인 촛불시위도 우리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촛불시위로 지펴진 ‘반미’ 감정은 12ㆍ19 대선의 돌발변수로 떠올랐다. 미국의 눈치를 살피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경쟁이라도 하듯 분출하는 반미감정을 표로 연결할 수 있는 전략마련에 고심중이다.

장영달 민주당 특위총괄본부장이 “SOFA 개정이 사실상 어렵다”는 심상명 법무장관을 향해 “미국 법무장관이 해야 할 발언”이라고 꼬집은 것도 반미 유권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친미’로 비치고 있는 한나라당은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듯하다. 이회창 후보는 가는 곳마다 ‘미국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외치며 SOFA 개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사망 여중생 추모 미사에 참석하고 부모를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대선주자들의 계산은 뻔하다. 지난 9월 총선에서 독일의 슈뢰더 총리가 이라크 사태와 관련한 반전여론을 ‘반미’ 정서로 엮어 역전승을 일궈낸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대선 후 당선자가 걸을 길도 슈뢰더 총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고…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었던 과거의 반미감정이 이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생겨난 반미정서로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선 전략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해 보탬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친미냐 반미냐’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우리의 군사ㆍ경제안보와 직결된 미국과 미국인을 제대로 아는, 지미(知美)의 지혜를 체득하는 일이다.

입력시간 2002/12/1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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