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의 한의학 산책]‘적당함’을 잃어버린 사회

직업 특성상 한의사들은 아무래도 옛날 책을 많이 보게 되고, 생각도 옛날 사람들과 공감하는 부분이 많기 마련이다. 엊그제 저녁을 먹고 잠시 산책을 하다가 문득 앞을 봤는데, 눈앞에 보이는 고층 건물이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가 없었다.

길거리의 차들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눈에 불을 켜고 달리는 게 꼭 조급증이 난 환자같이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 걷는데, 곧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주역(周易)이라는 책은 복희씨가 괘(卦)를 그리고 주나라의 문왕이 그 괘(卦)에 대한 설명을 했으며, 주공이 괘를 이루고 있는 효(爻)에 대한 설명을 붙인 책이다. 흔히 주나라 때 완성 됐다고 하여 주역(周易)이라 일컫는다.

여기에 공자가 십익(十翼)이라는 해설을 곁들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역에 등장하는 괘(卦)들은 총 64개로 각 괘는 막대기 여섯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천지(天地) 간에 발생되는 생장(生長), 수장(收藏)의 이치를 담고 있다.

공자가 지은 서괘전(序卦傳)에서 걾┲爪藺뙤噫 必大라 故로 受之以豊하고 豊者는 大也니 窮大者 必失其居라 故로 受之以旅하고…궣遮 얘기가 나온다. 풍(豊)괘 다음에 려(旅)괘가 나오는데, 풍(豊)은 풍성하다는 의미이고, 려(旅)는 나그네의 의미이다. 즉 풍성한 것 다음에는 나그네가 오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사회의 한 단면을 시사한다.

지금의 사회는 모든 물질이 풍성하고 문화가 발달하고 점차 부풀어 가는 사회이다. 건물도 점점 높아만 간다. 하지만 그 높은 아파트 안을 들여다보면 막상 편안하게 거주하는 사람은 적다. 모두 나그네가 되어 밖에서 떠돌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또한 그러하여,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마음은 허전함을 달랠 수가 없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는지도 모른다. 노래말에도 있지 않은가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고.

주역에 지금의 상황을 나타낸 괘(卦)가 또 있다. 택풍대과((澤風大過)괘다. 택(澤)은 못의 의미로 금(金)의 성질이 있고 풍(風)은 바람으로 목(木)의 성질을 띈다. 못 아래에 바람이 이는 모습을 상징하는 괘로, 말 그대로 크게 지나친 것이다.

옛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듯이 지나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대과(大過)괘를 문왕이 풀어놓은 말을 보면 기둥이 흔들리는 것이라 했다. 본말(本末)이 전도되는 상황을 뜻하며, 지금 흔들리는 우리 사회를 보여 주기도 한다.

또한 금(金)이 위에서 목(木)을 내리 누르는 의미로, 서양(金)의 물질 문명에 눌리는 동양(木)의 문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과(大過)괘 다음에 감(坎)괘가 오는데 이것은 험한 물 속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렇게 계속 지나치게 나가다 보면 험한 세상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계절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인생에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듯이, 우주와 세계의 흐름에도 이런 법칙이 있다. 누가 여름은 나쁘고 겨울은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며 지나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세상을 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 없이 속칭 잘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정말 성공한 삶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잘 적응하며, 앞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가는 힘을 길러 가는 삶이 아닐까?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취할 수 있는 점을 취해서 다음 세대가 보다 잘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환경을 조성해 주고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산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병원장

입력시간 2002/12/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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