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읽기] 남자로 산다는 것

2년만에 만난 선배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있었다. 형수와 아이들은 중국에 소재한 외국인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경제적 부담이 미국이나 캐나다보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중국의 외국인학교에 다니면 중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순간적으로 한국에서 외국어와 조기유학은 부모세대의 계급을 자식세대에서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보장성 보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대화의 주제는 오고 가는 술잔을 따라서 어지럽게 흘러갔지만, 기러기 아빠의 표정에서 엿보이던 묘한 자긍심과 그 어떤 씁쓸함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기러기 아빠는 자녀교육을 위해 아내와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고 국내에 홀로 남아 직장 생활을 하는 아버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이들만 유학생활을 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련된 대안(代案)이자, 공교육이 몰락한 한국의 교육현실이 연출한 사회적인 비극이며, 자식세대가 보다 나은 계층에 편입되기를 소망하는 중상류 계층의 계급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기러기 아빠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남자(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청승맞은 의문이 머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올해에는 남자와 관련된 두 권의 흥미로운 책이 발간되었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남자’와 워렌 패럴의 ‘남자 만세’가 그것이다. 슈바니츠는 특유의 박식과 위트를 내세워 남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별난 종족이니 여성들이 이해를 해달라고 능청을 떤다.

반면에 페미니즘 운동에 오래도록 관여한 경력이 있는 워렌 패럴은 남자를 둘러싼 사회적인 담론의 불균형과 몰이해를 지적하는 일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서술하는 태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주의적인 담론과 남성성에 대한 이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달리 말하면 남녀 사이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슈바니츠의 ‘남자’는 문화인류학과 사회생물학의 관점에 입각해서 남자를 설명한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되기 전에 남자들은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따라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권력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문명은 여성에 의해 고안된 것이며 문명의 목표는 남자를 길들이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거미줄에 걸려든 남자에게는 사회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처자를 양육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가 주어진다. 슈바니츠에 의하면, 남자는 생물학적으로 규정되는 성(性)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조직된 통과의례를 거쳐서 남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워렌 패럴의 ‘남자 만세’는 남자에 대한 일반화된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해서 맞서고 있어서 다분히 논쟁적이다. 그는 묻는다. 왜 남성에 대한 혐오는 유머가 되고 여성에 대한 혐오는 남녀차별이 되는가.

영화·신문·방송 등에서 나타나는 남성혐오와 남녀차별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남자에 대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선입관이 여성의 시각으로만 남녀 문제를 파악하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다고 해서 워렌 패럴의 책이 반페미니즘이나 마초이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성에 대한 사회적인 몰이해를 지적하고, 남녀에 대한 균형 잡힌 사회적 인식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두 저자는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침묵에 주목한다. 남자에 대해서는 남자 자신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남자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자들이 말을 안 하기 때문이다.

두 저자에 의하면, 남자의 자기표현 부족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영웅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힘들다는 남자의 고백이 가지는 함의는 동서양이 모두 같은 것 같다. 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씌워진 권력 게임의 올가미는 남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여성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게 되었다는 진단이다.

서양에서 발간된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우리사회도 남자가 문제다 라며 호들갑 떨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남녀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증대되어야 하며,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남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된다는 제안에는 경청할 만한 대목이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았을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2002/12/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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