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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나와라 뚝딱"… TV에 건다

"대권 나와라 뚝딱"… TV에 건다

미디어 정치시대… 길거리에서 안방으로 유권자 이끈 선거문화

대통령 후보로 나선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12월 1일 오후부터 모든 유세 일정 등을 취소했다. 그리고 곧 바로 전문가로 구성된 당내 미디어 팀과의 토론과 논의를 거친 뒤 예행 연습에 몰두했다. 3일 진행된 1차 TV 합동토론회를 대비하기 위해서 였다.

12월 3일 오후 8시부터 두시간 동안 KBS홀에서 고려대 염재호 교수의 사회와 3당후보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1차 TV합동토론회가 생중계로 안방에 전달 됐다. 이날 토론회에서 세 후보는 아무리 여유를 보이려 노력해도 어투와 분위기, 행동에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또한 헤어스타일, 양복색깔, 넥타이 모양새 등에서부터 어조, 어투 등에 이르기까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한 전문가의 손길과 후보자의 연출 노력이 배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정치 논쟁의 현장에서 살아왔고 수십 차례의 TV토론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후보는 일정을 취소하고 TV 토론에서 들어낸 긴장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제 진부한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미국 매스미디어 학자인 토드 기틀린의 ‘권력(대통령 당선)은 TV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3당 후보가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의 상당수도 이 말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수긍을 한다.


표심 흔드는 승부처 TV토론

정치 신인이면서 전세가 불리했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가 노련한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을 상대로 불리한 판세를 뒤집고 대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네 차례의 TV토론 때문이었다. TV 정치의 전형으로 자주 활용되는 이 사례와 같은 TV토론의 위력은 우리의 정치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97년 12월 1일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참석한 가운데 국내 처음으로 실시된 TV합동토론 직후 한 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1,000명 가운데 8.1%가 토론 방송을 보고 나서 지지후보를 바꾸었다고 답했으며 2.3%는 바꿀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한국 리서치가 토론회 보다 일주일 앞선 11월 26일 실시한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김대중 후보가 31.5%로 이회창 후보의 31.5%보다 불과 0.6%포인트 앞섰지만 토론회 직후 김 후보가 32.3%로 이 후보(27.3%)와의 격차를 5%포인트까지 벌렸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된 가운데 당시 TV 토론은 유권자의 대선후보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번 토론회 역시 대선 당일까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치열한 승부가 예상되는 가운데 대선후보의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칠 변수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이번 1차 TV토론 방송 3사 시청률은 1997년 합동토론회 시청률 55.7%보다 21.9%포인트 낮은 33.8%(TNS미디어 코리아자료)로 나타났다. 하지만 33.8%라는 숫자는 가공할 만한 것이다. 1,500만명 정도가 시청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국갤럽이 토론회 직후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64%가 이번 토론회가 후보 선택에 영향을 미쳤고 22%가 토론회 직후 투표할 후보를 바꿀 마음이 있다고 응답했다는 사실이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 이번 대선에서도 TV토론은 분명 하나의 결정적인 승부처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TV를 비롯한 미디어 정치는 길거리 유세와 대규모 군중집회 위주의 선거 풍토를 일시에 무력화시키며 우리의 선거문화를 고비용 저효율의 길거리 소매정치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안방 도매정치로의 전환시키는 매개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미디어를 이용한 선거운동은 길거리와 집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와 영향력면에서 놀라운 파괴력을 갖고 있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양근찬교수는 “TV를 비롯한 미디어 정치는 세계적인 추세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이고 후보들을 직접 만날 수 없는 다수의 유권자들이 후보별 정책이나 입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효율적인 선거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며 미디어 정치의 긍정론을 펼친다.

하지만 3일 TV합동토론회 전후해 신문 방송 등 각종 매체에서는 TV토론회가 후보의 정책과 비전 제시보다는 상호 비방에 치우쳤고 평범한 의견 개진만이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또한 미디어 정치가 후보의 식견과 정견, 직무수행 능력 지도력 등과 같은 정치지도자로서의 본질적인 측면보다는 자세, 표정, 어투, 외모, 연기력과 같은 지엽적인 측면이 중시되고 정치가 내용보다는 스타일과 이미지를 중시하는 폐해가 있다고 비판이 쏟아졌다. 미디어 정치의 가장 큰 폐해가 이미지의 포장 여하에 따라 유권자의 향배가 결정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미지와의 전쟁에 총력

각 후보 진영도 TV에서 표출되는 이미지와 스타일이 유권자의 표와 직결된다는 인식 하에 토론에서 논의될 정책 내용부터 토론을 진행하는 스타일을 자문하는 전문가부터 이미지 컨설턴트, 스타일리스트, 코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와 스타일로 유권자의 마음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는 전문가로 구성된 대규모 미디어 팀을 구성해 토론회를 준비했다. 이미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진용을 갖춘 것이다.

후보들은 넥타이까지 무척 신경을 썼다. 자유스럽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한 듯 노무현 후보는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를, 이회창 후보는 안정감을 강조하기 위해 붉은색 계통의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동아방송대 전희락교수는 “연설문이나 토론 내용뿐만 아니라 분장의 형태, 제스처, 의상 등 이미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고려해 방송 토론 등에 대비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 정치가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 2000년 미국 대선이다.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간의 토론회였다. 당초 유리하리라 던 고어후보는 풍부한 식견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고 엘리트적인 이미지로 유권자의 마음을 붙잡지 못한 반면 무식하고 저돌적인 인상의 부시는 오히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변신해 근소한 표 차이로 대권 장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체와 다른 ‘연출’ 함정도

전문가들이 지적한 현재의 토론회 제도의 문제와 방송 시스템이 개선된다 해도 이미지에 좌우되는 미디어 정치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노래를 못하는 가수, 연기력 없는 연기자가 대중이 선호하는 이미지를 조작해 연출하는 것으로 스타로 등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듯 영상시대에서는 이미지의 파괴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이 거리 유세를 하면서 직접 유권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유권자는 미디어에 의해 구축된 후보의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바라 본다. 각 후보가 제시하는 정책이나 비전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시선 역시 미디어에서 축성된 이미지의 색깔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후보의 이미지는 토론회에서 드러내는 각 후보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후보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과 방송 등 다양한 미디어 텍스트에 의해 구축된다. 각 후보의 이미지가 토론회 방송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미디어 정치의 폐해와 이미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기에 앞서 후보에 대한 실체 접근을 위한 사실 보도에 더 정진하는 것이 유권자가 이미지의 함정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 될 듯하다.


TV정치의 국내외 역사

한국 미디어 정치사에 새장을 연 것은 14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1992년 12월 1~3일 선거를 코 앞에 두고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이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등 3당 후보를 차례로 초청해 토론회를 개최했고 이를 KBS, MBC 등 지상파TV가 녹화중계하고 CBS라디오는 생중계했다.

당시 특정후보의 토론방송을 금지한 선거법 때문에 기자회견식으로 진행됐지만 한국 미디어 정치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후 1993년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는 TV토론방송이 전국 방송사에서 100회 진행됐고 TV정치시대를 연 1997년 대선 때에는 후보와의 대담, 후보 개인별 초청 토론, 각당 후보간 토론회, 각당 지지연설, 정치광고 등 선거 관련 프로그램이 생생하게 안방에 전달됐다.

TV정치가 가장 활발한 곳은 역시 미국. TV가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대선 당시 아이젠하워가 TV연설 등을 선거에 효과적으로 활용해 집권에 성공했고 민주당 케네디와 공화당의 닉슨은 기념비적인 TV토론회를 벌였다. 미국에서는 정당과 무관한 대통령선거토론위원회가 토론 패널을 선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선거 관련 방송에 공정을 기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TV토론회가 언론인 주도에서 시민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1974년 TV토론이 본격화한 프랑스는 방송사와 후보간의 합의에 따라 토론 등 방송형식과 패널을 결정했다. 일본의 경우 각 당 당수의 TV토론은 1960년과 1963년 두 차례 시행됐으나 이후 4번의 총선에서는 이뤄지지 못했다. 1990년 2월 총선에서는 5당 당수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knbae@hanmail.net

입력시간 2002/12/1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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