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잇, 반장선거만도 못한 …"

'줌마'가 본 2002 대한민국 정치

망령들의 집회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패배’에서 보여준 새로운 선거문화의 가능성은 진작 싹이 잘리고 선거전 중반에 들면서 또 다시 폭로전과 지역주의, 색깔론으로 선거마당이 얼룩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판을 벌리면서부터 있어 온 뻔한 메뉴들이 다시 밥상에 올랐다.

폭로전이 한창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어느 날 만난 친구는 애들 반장선거만도 못한 이 싸움에 실소한다.

또 언제나 빛깔 좋은 과일을 트럭 가득 싣고 오는 단골 과일장수 총각은 “잘은 모르지만 아직도 동네 꼬맹이들 하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는 거 같다”고 조심스레 털어놓는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라. 보이기 위한 ‘액션’의 최첨단에 ‘정치’가 자리하고 있는데 내 이웃들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까뒤집고 떠드는데만 혈안

안정된 시청률을 확보하려면 우선 제대로 된 쇼를 하는 것이 원칙 아닌가. 그럼에도 점차 떨어지는 시청률을 회복하기 위해 내놓는 메뉴가 또 이런 거라니! 도무지 상상력이 없는 모양이다. 상상력이란 게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하는 고민이 주는 알토란같은 열매일 텐데.

그러고 보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국민들에 대해 별반 아는 것도 느끼는 것도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요즘 누가 뭘 어쨌다고 까뒤집고 떠들어봐야 누가 신경이나 쓰나? 비리다 뭐다 해서 실컷 분위기 띄우고 ‘성역’이란 유행어 몇 년에 한번씩 회자시키고 나면 그만일 걸. 그리고 21세기의 벽두에 다시 거론되고 있는 ‘반미=빨강’이라는 논리는 이제 전설이 되어야 마땅하다.

오야붕 왈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젤~~~이쁘지?”

(거울 뒤에서)꼬봉 왈, “물론 우리의 오야붕님이죠~~~”

평균 시청률 30%대를 기록한 첫 TV토론회에서 자기 허물은 뒷전이고 남의 티에 집중하는 걸 보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말하자면 원래 내가 제일 예쁘니까 내 ‘미모’에 대해선 새삼 말 할 필요 없고 상대의 미모가 ‘화장빨’과 ‘성형수술’의 결과라는 사실만 밝히면 상황은 종료될 거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요즘 같아서는 웬만하면 딸리는 기억력에 감사하며 과거니 역사 이런 거와 단절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 자신 아무리 발버둥쳐도 단절할 수 없는 뭐 묻고, 뭐 묻은 과거의 소산이고 자식이지 않은가. 어차피 제대로 화끈하게 밝혀낼 생각이 없다면 과감하게 그냥 넘어가주자.

그 대신 지금부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중해보자. 허구 헌 날 과거, 현재, 미래가 잡탕이 되어 한 통에 돌아가니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지 않은가.(어랏, 그걸 원하는 것인가?) 바라건대 후보들이여 ‘현재’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제는 그걸 고민하자.

“효순이, 미선이를 살려내라.”

“살인 미군 처벌하라.”

11월 30일 광화문 네거리, 지난 여름 붉은 물결이 힘차게 용트림하던 그 거리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그때(아, 월드컵!)처럼 한 가지 뜻을 가슴에 품고 모여들었다. 억울하고 또 억울하게 생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영혼이 가는 길을 밝히고자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시민들은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젊은 직장인, 대학생, 하교 길의 중, 고생에서부터 겨우 초를 손에 쥘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한 목소리가 되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해 머리 풀고 길길이 뛸 수 있었으면, 차라리 미친 년 널뛰듯 그렇게 뛸 수 있었더라면 지금 아이들 앞에 이렇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저 세상으로 간 그 날 이후 이 땅 곳곳에서는 끊이지 않고 이 아이들의 기막힌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하는 모임이 끊이지 않았다. 주권이란 엄청나 보이는 말은 몰라도 내 새끼 죽인 X에 대해 말 할 줄은 안다.

이렇듯 아픔이 온 나라를 뒤덮어가는 데도 귀가 막히고 눈이 봉사라 시종 입 꾹 다물고 안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공사가 다망(亡?)해도 그렇지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는 국민정서와는 무관하게 그저 좀 걸리적거리는 소파(SOFA?) 모서리나 사포로 문질러 보잔다.

또 현 정부보다 100배는 더 국민의 마음을 헤아릴 듯 덤비던 대선 후보들은 긴 잠수 끝에 튀어나와 뒷북이나 치고 있으니. 참 희한한 일이다.


폼나는 선거 기대한 국민이 불쌍해

“엄마, 이건 국가 대 국가로서 항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 일개 가정을 운영할 때도 크고 작은 일이 있고, 때로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일도 다반사다. 또 일의 중요도에 따라 선후를 정해야 하며 때론 그 중 어떤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적잖다. 그래서 가정의 살림을 도맡은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그 가정의 색깔이 드러난다.

정치라는 것도 결국 한 나라의 살림살이를 그 본령으로 하는 것인데 제 새끼 잃은 상황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을까. 실제로 단 한 명의 후보만이 당일 유세 일정을 다 취소하고 추모현장으로 달려갔다.

한 후보는 당일 집회장소에서 하기로 한 유세일정을 급히 취소함으로써 귀하신 몸(?)을 보호했고 또 한 후보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 어려워(사상검증이란 직격탄을 피하고자) 당 차원에서 모든 추모집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주어 할 것 같단다.

솔직히 줌마의 감성으로는 내 자식을 치어 죽인 X의 눈치나 보는 형국으로 밖에 정리되지 않는다. 분명 금쪽 같은 내 새끼가 둘이나 죽었는데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말에 승복하라니! 이보다는 오히려 그 아이들 위를 겁 없이 지나간 ‘장갑차라도 구속해!“야 된다는 우리 아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미국에 대해 정말 아무 책임이 없을까. 어쩌면 우리 중 일부는 그 덩치 큰 영웅의 빗나간 인성을 등에 업고 국민들을 겁주고 을러대고 있는 건 아닐까. 줌마는 아직 아들아이의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참, 이상하네요. 이맘때면 오가는 사람들이 다(선거에 대해)한 마디씩은 할 텐데…아무도 말을 안 해요.”

그러나 오늘도 동네방네 설탕물(가짜 약)을 팔러 다니는 약장수처럼 ‘기호 O번 XXX후보 입니다~~!’라고 떠들며 돌아다니고 있다. 이제 선거전도 막바지다. 애들이 죽어 자빠지는 상황에서도 할 말 못하면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듯 서로 비난하느라 여념이 없는 후보들을 보며 후끈 달아오르지도 못한 채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폼 나는 선거전 한번 보고자 했던 국민들의 열망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처사다. 아름다운 패배로 잉태 된 국민들의 열망은 그대로 ‘깨라 몽(夢)!’이 되었다.

“그래도 선거에는 참여해야죠, 이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바람 부는 광화문에서 바람에 대항해 서 있는 아이들에게서 부끄러움과 희망을 동시에 본다.

양은주 정치평론가

입력시간 2002/12/1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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