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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자존심을 밝힌 祭儀

그제는 책을 사러 광화문에 들렀습니다. 책을 구해서 바깥으로 나오니 짧은 겨울 해가 그 사이에 기울어 이미 날이 어두워졌더군요. 광화문으로 갈 때부터 멀리서나마 촛불시위를 지켜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선 양과 효순 양을 조문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송스러움이 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추모와 항의의 물결 속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미선양과 효순양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자리에는 연령이나 성별 또는 계층의 차이에 따른 구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해맑은 얼굴의 중고등학생에서부터 자유분방한 차림의 20대 젊은이들, 이제 막 직장에서 퇴근한 듯한 인상의 직장인들, 올망졸망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촛불 시위에 참여한 엄마 아빠들,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주름살의 골이 더 깊어 보이기만 했던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날씨는 야박스러울 정도로 차가웠지만, 추모와 항의의 열기 때문에 한겨울의 날씨마저 잊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돌아오는 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미군의 장갑차에 의해 무참하게 죽음을 당한 두 여학생과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유대의 끈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더군요. 6월의 월드컵세대가 반미세대로 나타났다는 일부 언론의 평가는 대체로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반미(反美)라는 말로는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이 가해자이자 원인제공자인 만큼 미국에 대한 반감이 표출되는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촛불시위를 반미로 단순하게 규정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수긍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광화문의 촛불시위에서 제가 보고 느꼈던 것은 ‘확장된 가족 관념에 근거한 정감(情感)의 정치학’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촛불시위가 이념 부재를 정서적 공감으로 메우고 있는 심정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제게는 이념적 지향이 정서적 공감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두 여학생이란 어떤 존재였을까요. 어린이들에게는 언니나 누나이고, 중고등학생에게는 또래의 친구나 후배일 겁니다. 청년층에게는 귀여운 누이동생이고, 중년 이상에게는 딸과 손녀로 다가왔을 테지요.

따라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확장된 가족 개념,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 또는 민족의 범주를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촛불시위가 지속성을 가진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집회가 될 수 있는 원천적인 근거는, 확대된 가족과 공동체의 관념을 몸으로 경험하는 제의(祭儀)이기 때문입니다. 촛불시위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어린 자녀를 가슴에 안고 촛불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30~40대의 부모들이었습니다. 386세대로 보이는 부모들에게 두 여학생의 죽음이 결코 남의 일로 다가올 수는 없었겠지요.

또한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되새겨보며, 부모의 젊은 시절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자녀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월드컵의 붉은 열기가 취향의 민주주의와 열정의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장관이었다면, 촛불시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가족의 확대된 형태로서의 공동체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자존심입니다. 부패로 점철된 사회에 대한 환멸을 넘어 정정당당한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 월드컵의 경험이었듯이, 촛불시위는 국제관계 속에서 정정당당함(fair)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는 나라가 결코 식민지일 수 없다는 정치적 자존심이 하나하나의 촛불마다 빛나고 있었습니다.

촛불시위는 적(敵)을 만들고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대결의 방식이 아닙니다. 어린 생명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모하고, 미국의 오만방자함에 이성적으로 항의하며, 정부의 무능력과 무관심을 질책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념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촛불시위는 한국인이 찾아낸 저항의 새로운 양상입니다. 촛불시위를 억압하는 어떠한 물리적인 행위도 모두 ‘폭력’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경계선의 몸짓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광화문에는 촛불들이 모여들겠지요. 여전히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촛불시위를 지켜보며 그 의미를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겠지요. 다시 한번 두 소녀의 명복을 빕니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tan@empal.com

입력시간 2002/12/2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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