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선거혁명의 싹을 보았다

21세기 들어 첫 번째 대통령 선거인 16대 대선을 치르면서 우리 정치문화, 선거문화가 시나브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돈이나 지역감정, 흑색선전 등이 예전에 비해 힘을 많이 잃었다는 점이다. 법정 선거운동 초기에 도청공방 등 폭로공세가 잇달아 이번 선거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폭로를 주도했던 한나라당은 곧바로 폭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도 흑색선전과 폭로전에 대한 맞대응을 자제했다. 폭로의 효과가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 선거문화, 우리 유권자들의 의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TV와 인터넷을 통한 미디어 선거운동이 대규모 군중집회를 봉쇄했다는 점이다. 고비용 정치구조를 바꿀 대안으로 도입된 TV토론이 유권자의 선택에 중요한 기준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TV합동토론이 진행된 뒤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유권자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 꼴로 TV토론이 후보 선택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다만 TV 합동토론은 모든 후보를 다 초청하지 않아 작은 정당과 무소속 후보들에게는 불리했다.

또 세 차례 열렸던 TV합동토론은 97년과 달리 후보자간 1:1 토론방식이 도입되는 등 진일보했다. 그러나 답변 시간이 1분30초나 1분으로 제한돼 심도 있는 토론은 이뤄질 수 없었다는 문제점은 뛰어넘지 못했다.

미디어 선거가 활성화되면서 세 과시를 위해 몇 십만 명이나 심지어 몇 백만 명씩 유권자를 동원하던 고비용의 대규모 군중 유세가 거의 사라졌다. 22일간의 선거운동 기간 중 각 정당은 모두 315회의 정당연설회를 열 수 있었으나 몇 차례 열리지 않았다. 유권자를 동원하는 대신 후보와 정당들은 유권자를 찾아 다니는 소규모 거리유세를 벌였다. 그러다 보니 돈도 예전보다는 덜 썼던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 선거의 또 하나의 축인 인터넷도 이번 대선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네티즌들의 온라인 선거운동은 새로운 선거문화로 급속히 자리잡았다. 포탈 사이트인 다음 커뮤니케이션은 11월부터 ‘2002 대선유권자연대’ 등 7개 시민단체와 함께 대통령선거 사이트를 개설해 100만 유권자 약속운동을 전개했다. 이곳에는 하루 방문자가 10만~15만명에 이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코리아닷컴도 대선 뉴스보기와 ‘나도 한 표, 이렇게 생각한다’등의 대선특집 코너를 만들었다. MSN은 ‘함께 하는 시민행동’이란 시민단체와 함께 메신저를 이용해 유권자들의 투표참여와 정책 등에 관한 의견을 모았다.

이 같은 네티즌들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해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도 뜨겁게 펼쳐졌다. 각 후보진영은 이들 사이트에 앞을 다퉈 인사말 동영상을 올리는가 하면 각 후보들의 대선 홈페이지도 젊은층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정치만화나 후보 캐릭터 등을 선보였다. e메일을 통한 선거운동도 활발했다.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선거운동도 나타났다.

다만 사이버 선거운동이 별다른 제약 없이 상호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면서 오히려 올바른 후보 선택을 막는 측면이 있었던 것은 유감이다. 어쨌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데다 쌍방향성이라는 특성이 있어서 인터넷 선거는 유권자를 수동적 군중에서 능동적 주체로 자리바꿈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유권자의 적극 참여는 이번 대선의 또 다른 큰 흐름이다. 대학가에서 선거 참여 열기가 높았다는 것이 그 좋은 사례이다. 부재자투표소 설치운동을 벌인 결과, 서울대와 연세대, 대구대에는 사상 처음으로 대학 내에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되었다.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극단적 지역주의의 힘이 이번 선거에서 예전 같지 않았던 것도 유권자의 의식변화 때문이다. 지역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인들이 여전히 지역주의를 부추겼지만 유권자가 여기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정책적 차별성에 무관심하고 지역주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던 유권자의 변화는 정당으로 하여금 앞으로는 상호 비방과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포기하도록 만들 것이다. 결국 유권자 의식변화의 흐름이 이번 선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새 대통령은 승리의 기쁨에 들떠있을 것이 아니라 이번 선거결과에서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민심을 읽어야 한다.

손혁재 시사평론가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입력시간 2002/12/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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