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만이 알 결과를 여론조사가?

역대 선거중 이번 16대 대선만큼 여론조사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된 적이 또 있었을까. 예년보다 2~3개월 앞선 시점에서 일찌감치 각 정당들이 대통령 후보들을 선출해 5월께부터 여론조사에 의한 대선 레이스가 치열하게 벌어졌으며, 지지율 2,3위의 후보들이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를 이뤄내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각종 언론기관에서 앞다퉈 발표된 6개월여의 대선 여론조사 지지율 변화 추이를 놓고 정당 내부에서는 후보 교체론과 단일화론, 대세론 등을 거론하며 후보들을 흔들어댔고, 특정 후보에 유리하도록 지지율이 가장 낮은 후보의 지지를 밝히는 이른바 ‘역선택(逆選擇)’이란 신조어도 등장하게 됐다.

후보 등록일인 11월26일부터 모든 여론조사 결과 발표가 금지됐다. 그 이전까지의 지지율 조사에서는 평균 10% 포인트 가량의 차이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앞선 것으로 나왔다. 그로부터 선거일까지는 20여일.

그간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와 북한 핵문제, 행정수도 이전 공방 등 많은 변수가 있었다. 당연히 후보 지지율도 20여일 동안 극심한 변화를 가져왔다. 한나라당은 “후보 등록일 때는 단일화 바람으로 다소 밀렸지만 12월10일께부터 역전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민주당은 “지지율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조사기관의 결과를 보면 두 후보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풀지 못할 정도로 오차범위 부근에서 혼전을 벌이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론조사 관계자들은 “후보 등록시점에서 두자리 수까지 벌어져있던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박빙의 차이로 근접했다“며 “두 후보가 팽팽한 지지율 승부를 벌이고 있어 섣불리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무응답층의 진짜 표심, 응답 기피층 가려내기, 역 지지표명, 지지자 투표율 등의 함정이 당락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로 떠오른 상황이다.


과거에는 “무조건 여당지지” 표명 많아

과거 군부독재 시절 선거 여론조사 결과의 신빙성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공작 정치가 횡행하던 시절이라 여당 지지를 밝히지 않을 경우 어떤 화(禍)를 부를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물론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은 현저히 낮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기성세대들은 야당후보 지지를 선뜻 말하기가 여의치 않다.

과거의 공포 정치 시절을 경험한 데다 최근에도 도청 정치 공방 등이 이어져 웬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을 지우기가 힘들기 때문.

실제 사전 조사와 선거 결과사이에서는 곧잘 ‘삐딱선’이 나타났다. 1996년 총선은 우리나라 여론조사기관이 첫 헛발질을 한 선거. 투표가 끝난 오후7시께 각 언론기관에서는 여당인 민자당이 170석이 넘는 의석을 갖게 될 것이라고 떠들어댔지만 무려 30개 지역구의 예측이 빗나가 외신에서조차 망신을 당했다.

이어 98년 부산시장 선거와 지난 6ㆍ13 지방선거에서도 예측과 결과가 뒤바뀌는 등 오답 상황이 발생했다.

오답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여당 후보가 우세하더라도 그 차이가 크지 않다면 결과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이는 투표율이 대선보다 상대적으로 저조해 지지층의 상당부분이 투표를 하지 않은 점도 있거니와 아무래도 장년층에서는 과거의 정치사를 감안한 역 지지표명이 많았던 탓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같은 오답 사례는 여론조사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종종 있어 왔다.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론조사결과 오답의 역사를 시작한 해. 이미 192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대통령 당선자를 정확히 예측해내 권위를 인정받던 시사월간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무려 1,000만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고 이중 응답자는 200만여명이었다.

조사 결과 공화당 앨프리드 랜던 후보가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를 57대 43의 비율로 눌러 이길 것이라고 했으나 결과는 60.8%의 표를 얻은 루스벨트의 압승이었다. 이 충격으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결국 폐간됐다. 오답의 원인은 조사대상 추출에서 비롯됐다.

전화번호부와 자동차등록부, 이 잡지 정기구독자 명부 등에서 대상자를 뽑았는데,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당시 전화ㆍ자동차를 갖거나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으로 공화당 지지자가 다수였던 것.

1948년때도 쟁쟁한 조사기관들이 모두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가 현직 대통령인 민주당의 해리 트루먼을 큰 차이로 이긴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트루먼이 5% 포인트 이상의 차이로 승리했다. 트루먼이 ‘듀이 당선'을 보도한 시카고 트리뷴을 들고 찍은 사진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또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부시 후보와 앨 고어 후보간 우세 전망이 여러 기관에서 엇갈리게 나왔었다. 공포정치가 없는 미국에서 조차 이 같이 정확도가 떨어져 여론조사 무용론(無用論)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노 후보 오차범위 부근에서 혼전

이번 대선에서도 여론조사기관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단순지지율은 여당인 노 후보의 근소우위, 당선 가능성면에서는 이 후보의 우세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당인 노 후보 지지층에는 아무래도 허수(虛數)가 어느 정도 포함돼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절대 지지층인 20~30대의 투표율도 장년층보다는 낮을 수 밖에 없어 ‘지지층=득표수’의 등식이 쉽게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조사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1,000명의 표본집단을 구하기 위해 예전 같으면 3,000~4,000명의 응답자를 조사하면 가능했다고 한다. 2,000~3,000명의 응답회피층을 가리고 나면 진짜 표심을 읽을 수 있는 알토란 같은 1,000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표본집단 구성에서부터 엄청난 난관에 부닥친다고 한다. 1,000명을 정하기 위해 적어도 8,000명하고 접촉을 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전화응답 성공률이 통상 15%에 달했는데 최근에는 6~7% 대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버리는 카드인 7,000명의 표심의 행방이 당락을 가를 분수령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 같은 기현상에 대해 92년과 97년 대선에서는 지역별로 표심이 정확하게 분리됐지만 이번 대선은 혼전을 벌이는 지역이 수도권과 충청ㆍPK지역에서 강원ㆍ제주 등지로 확대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한다. 영남 출신 후보가 호남에서 절대 지지를 받고, 타 지역 후보가 영남에서 우위를 보이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따라 선뜻 지지의사 표명을 꺼리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관계자는 “양자 대결시 여론조사에서 어느 한쪽이 8% 정도의 우위를 보인다면 어떤 변수를 대입해도 승패는 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그런데 이-노 후보의 지지율조사에서는 누구도 이 정도의 우세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19일 16대 대통령 선거일에 투표가 끝난 오후 6시이후 각 언론사에서는 출구조사를 토대로 오후 7시께부터 당선 예상자를 발표한다고 한다. 자칫하면 1936년과 48년에 미국이 경험했던 실수를 우리가 맛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노 후보, 서로 “지지율 우세” 주장

국민의 선택을 며칠 앞두고 한나라당은 뒤지던 여론조사 지지율을 뒤엎어 승기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민주당은 지지율 격차를 더욱 크게 벌렸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은 북한 핵 위협과 노 후보 측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의 허구성 등으로 인해 부동층 상당수가 이 후보 지지로 돌아섰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여기에 이인제 자민련 총재대행 등 충청권 의원들이 이 후보 지지를 천명했고, TV 토론에서 보여준 이 후보의 안정감이 유권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결과라고 밝혔다.

이에 민주당은 노 후보의 인간미를 앞세운 광고전략이 먹혀 들고 있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의 공조 유세가 단풍(單風)을 다시 불게 하는 효과로 작용해 지지율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고 강조한다.

각종 여론 조사기관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대체적으로 노 후보의 우위로 출발한 지지도가 몇번 요동을 친 뒤 막판에 차이가 좁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어떤 기관은 이 후보를, 다른 기관들은 노 후보의 우위를 주장할 정도로 조사기관별 결과 차이도 나타나는 실정이다.

누가 우세하다고 족집게로 집어내기는 힘들더라도 박빙의 승부구도를 벌이는 양상인 점에는 양당 모두 인정하고 있다. 서로가 지지율 우세를 호언하며 승리를 장담하고는 있지만 양당 모두 내심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지율이 불과 5% 포인트 이하의 차이를 나타내는 선거에서는 더욱 마음을 놓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양당 모두 아전인수격으로 현 상황을 해석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숨어있는 표심이나 부동층의 절대 다수가 우리 편”이라고 하고, 민주당은 “매 대선마다 지지율 격차가 그대로 개표 결과로 이어져 왔다”고 믿고 있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2002/12/20 17:22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