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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극작가 이강백

방금이라도 눈이 퍼부을 것 같은 12월 초 오후 4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이런 쓸쓸한 날이면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재촉할 뿐, 머무르지 않는다. 상점의 주인들은 아예 창문을 닫은 채 손님을 기다린다. 농구대 하나를 둘러 싸고 각축을 벌이는 몇몇 학생들의 몸짓이 살아 있음을 증거할 뿐이다.

새 모이를 뿌리면 삽시간에 모여드는 비둘기떼와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 아이처럼 ‘호호’ 입김을 내불면 더 그럴싸한 사람. 문예회관 대극장 담벼락에 빽빽하게 채워나간 우수마발의 낙서 옆에 서서 발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 보는 모습이 제격인 사람. 망육순의 나이에도 35번째의 작품을 구상하는 사람.

세월은 가고, 그는 머물러 바라 본다. 극작가 이강백(56)은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중 한 구절과 무척 닮아 있었다. 유민영, 김방옥, 박조열 등 연극계 원로들과 함께 경기 이천 유네스코 수련관에서 문예진흥원의 2003년도 지원 심사 작업을 철야로 해치우고 갓 상경한 그의 얼굴이 부시시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연극쪽으로 옮아 가자 얼굴엔 금방 화색이 돈다. “당대와 유리된 것들이 실은 동시대와 상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을 때 연극쟁이들은 반가운 거죠.” 4~5월 국립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됐던 최근작 ‘진땀 흘리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삶의 내면을 응시하다

그의 첫 역사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현재에 대한 또 다른 은유이기도 했다. 어머니 장희빈의 원혼을 풀어 주려는 아들 경종의 몸부림과, 노론 대 소론의 치열한 당쟁이 맞물려 이뤄내는 한 편의 풍경이 전면에 나서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들이 닥칠 대선 상황하의 한국에 대한 은유라는 사실은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재빨리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결정을 유예해 보려는 경종의 고뇌가 중견 연출가 채윤일의 재치 있는 해석으로 형상화됐다.

정작 공연 당시 관객은 가물에 콩나듯했지만 이강백은 “공연 성과가 좋았다”고 말한다. 미학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다. 대선이 임박한 11월에 두드러졌던 역사극 봇물을 예고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극단 물리의 ‘광해 유감’, 국립극단의 ‘줄리어스 시저’가 대표적인 예다. 2001년 초연, 2002년 재공연이란 기록을 세웠던 국립극단의 ‘마르고 닳도록’은 그의 존재를 새삼 돌이켜 보게 한 작품이다.

“국립극단은 국가의 고급 홍보단이라는 선입관을 깨기로 작정하고 쓴 작품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는 언제나 동시대인 보다 먼저, 그들의 의표를 찔러 왔다. 한국에 와서 생트집을 잡으며 행패를 부리는 스페인 마피아들의 이야기인 ‘마르고 닳도록’은 재기발랄한 상상력의 좋은 예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이 스페인 덕택이라며 그 동안 체불된 저작권료를 받아 내려 이승만부터 5명의 역대 대통령들과 좌충우돌 한다는 엉뚱한 전제 아래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인 한국 현대사를 펼쳐 보인 극이었다.

이 작품은 영화사 K&K가 원작권을 매입해 현재 김동원 감독의 지휘 아래 영화로 거듭날 계획이다. 차범석의 ‘산불’, 김광림의 ‘날 보러 와요’, 이윤택의 ‘오구’에 이어 연극이 영화화되는 기록을 하나 추가하게 됐다. 연극은 그를 만나 별난 놀이가 됐고 마침내 삶의 무게까지 끌어 안는다.

2002년 4월부터 공들여 쓰고 있는 35번째 작품에서는 연극 특유의 유희성이 극대화된다. 제목부터 ‘연극’이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삶의 진실이고 허구인지, 우리가 삶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등의 심각한 문제를 정면에서 응시한 작품이다.

지금껏 무수히 맡아 온 역할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해 해고 당하는 배우의 이야기다. 이번에는 극단 연극세상의 대표 김갑수가 의뢰했다.


상상력과 유희성의 극대화

“문제는 유희 정신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매우 잔인해 질 수 있어요. 자폐적으로 돼 타인을 증오하는 사람말이죠.” 예를 들어 대관령에 스키 타러 영동 고속도로를 가는데, 길이 막힌다고 짜증만 내는 사람과 이것도 재미라고 느끼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도서 출판 평민사와 모든 작품을 책으로 묶어 내기로 약속한 것이 그 ‘운’의 대표적 케이스일 것이다. ‘이강백 희곡전집 제 1권’은 국내 작가의 희곡집으로 가장 많이 팔렸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파수꾼’, ‘결혼’, ‘보석과 여인’ 등의 초기작은 희곡에 대한 인식이 미약한 상태의 한국에서 희곡 장르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구적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발표 시기를 막론하고 언어 특유의 상상력과 유희성이 훌륭하게 표출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그의 작품 ‘들판에서’는 생존 극작가 중 유일하게 교과서에 수록됐다는 영예에 빛난다. 또 대학교 국어 교재에는 ‘파수꾼’, ‘결혼’ 등이 실려 있다. 현재 6집까지 나와 있는 그의 희곡 전집은 집필 중인 ‘연극’을 제 7집에 수록한 뒤, 제 10권까지 채울 요량으로 전진 중이다.

적어도 10권을 채우기 전까지는 그의 집필 작업이 멈출 수 없다. 10권을 모두 채우는 날, 1970년대 명동을 상징했던 이병복의 ‘까페 떼아트르’가 그의 단막극들의 힘으로 되살아 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잊어 버린 ‘쌀롱 문학’의 전통이 그의 희곡을 중심으로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강백은 “공연 예술의 기본인 단막극은 공연 예술의 기본”이라며 “요즘 홀대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소 위악적인 어투로, 그는 자신의 존재론적 모순성을 재미 있게 밝힌 바 있다.

‘나는 박쥐다. 문학계에 가서는 희곡은 문학이다 라고 말하고, 연극계에 가서는 희곡은 연극이라 말한다. 나의 이러한 태도는 역시 태생적이다. 양쪽 어디에도 속할 수 있고, 또한 그 어느쪽에도 속할 수 없는 이중 모순…’(한국일보 2002년 7월 11일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 이중성 또는 모순성은 몸 담고 있는 시대의 지각 변동에 늘 깨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페미니즘 시대에 대한 대응 방식 역시 그답다. 한 번도 여자 혹은 여성성을 작품 중심에 놓아 본 적 없는 그가 차기 작품의 중심에 여성을 위치시킨다. 이것은 “작품에 왜 그렇게 여성이 없느냐”라며 여배우들이 퍼부어 온 낯익은 항의에 대한 나름의 뒤늦은 대응이기도 하고, 여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는 자신의 결심이기도 하다.


“나이 든 여배우와 작업하고 싶다”

“여자는 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했던 괴테의 말에 대한 이강백식 버전이다. 이 작품은 똑 같은 대상을 접하지만, 왜 남녀가 서로 다르게 보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여배우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작품을 쓸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든 여배우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에 잇달아 “내가 (여배우들한테) 먼저 구애한 거예요”라며 웃고는 천진난만함을 사방에 흩뿌린다.

그는 “쓰는 일이란 영원한 갈증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30대의 그는 역사에 남을 명작을 쓰겠다는 강박에 묶여 있었다. 모든 것을 대중 문화 산업의 틀속에 가둬버리는 이 시대, ‘슈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 2002’로 버전 업된 광고 포스터 앞을 무심코 지나치는 그에게서 삶의 하중은 휘발돼 버리고 있었다.

“연극이란 것을 통해서 삶도 허구란 사실을 받아 들이자”는 그는 오늘도 연극이란 빈 공간속에서 즐거운 반란을 꿈꾸고 있다.

미완성의 상태에서는 서로의 작품을 보지 않기로 약속한 시인 김혜순을 부인으로, 시카고 대학 미술학과 재학 중인 이휘재(22)를 자식으로 두고 있다. 자식은 하나만 두기로 약속한 상태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이름만 딱 하나 먼저 지어 두고 얻은 딸이다.

2003년은 그에게 특별한 선물이 주어진다. 대학교에서 단막극 오페라의 교과서적 작품으로 종종 공연돼 온 ‘결혼’이 번듯한 무대에서 재공연될 예정이다. 중견 연극 배우 박정자, 한양대 연극영화과 등이 향후 그의 활동에 실질적 힘이 돼 주기로 약속했다.

장병욱 차장 ahe@hk.co.kr

입력시간 2002/12/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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