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마정치] 정치판 발꿀 작은 불씨를 지피자

'옳고 그름' 표로 심판, 국민의 힘 보여줄 중요한 시기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로운 세기의 새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후보들의 행보를 지켜봤다. 여전히 멋지지 못한 구태를 답습하려는 불쾌한 움직임들이 들먹거렸고 우리들 중 일부는 이 구태를 보며 ‘우리 아직 멀었다’며 눈을 돌린다.

우리들의 가슴 속엔 인생의 젊은 한때를 온전히 바쳤음에도 달라지지 않고, 이제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우리의 역사 앞에 좌절하고 광장을 등진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뒤돌아 앉아 ‘과거와의 대화’라는 오래 된 사이트에 접속한다.

우리들의 과거는 쓰라린 패배와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고 현재의 상황 역시 척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그 연속선상에 놓여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오래 된 사이트다. 이젠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E H Carr(헉, 이걸 기억해 내다니!)라는 영국 사학자의 역사철학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줌마는 우리가 젊었던 한 때 교과서처럼 읽고 정신을 빼앗겼던 그 책의 이 한 소절에 우리의 과거는 물론 창창한 미래까지 저당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 말이지. 우리 역사는 늘 그렇게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하게 밟히고 물리고 뜯기기만 한 것 같기 때문이다.


진일보한 정치문화

그러나 우리는 분명 보았다. 바로 몇 달 전, 뜨거운 태양 아래 광화문의 붉은 물결이 세계를 압도했던 그 날과 바람 앞에 곧 스러질 것 같은 가녀린 촛불행렬이 바람 많은 광화문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는지.

우리 아이들은 음습한 과거의 그늘 따위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 현재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뒤돌아보지 않고 표현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가르친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가지고 ‘자존심’에 위해를 가하는 불온한 것에 강렬하게 반응하고 있다. 누군가 선동하고 불러낼 필요가 없다.

개개인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욕구를 드러내고 공감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분노가 너무 가볍고 일시적인 충동이라고, 그 끝이 없을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자. 이것은 큰 불씨를 품어낼 작은 징후이다. 이처럼 바로 우리 눈앞에서 가능성들을 보면서 우리 또한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마는 것을 아닐까.

가만가만 보자. 한 겨울 끝 자락에 두꺼운 얼음이 저 밑에서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녹아내리듯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대선 문화가 진일보해 가고 있다.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자. 그리고 잘한 일에는 일단 점수 주자. 재고 따지느라 어물쩍거리지 말고 팍팍~ 밀어주자!

첫째,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매스미디어의 힘을 보았다. 미디어가 무엇인가,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공적, 간접적, 일방적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대중이란 성립기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더 이상 야심한 밤에 알만한 얼굴들끼리 ‘안가’에 모이는 걸로는 ‘쇼부치기’가 어려워진 것을 의미한다. 적외선 망원경을 장착한 국민들의 눈은 이제 밤이 두렵지 않다.

TV합동토론회는 바로 그 짜릿한 결실의 하나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사상초유의 대선후보들 간의 토론회가 열렸고, 우리는 이를 통해 대선주자들이 서로의 견해와 정책, 이력에 대해 공격하고 답변하느라 땀 흘리는 광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후보들 역시 높은 시청률을 의식해 엉뚱한 데 돈 덜 쓰고(이거 뚜껑 열어봐야 안다고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 합동토론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정치에 대해 칭찬을 하고 싶다. 칭찬하게 해주라!

둘째, 인터넷이 또 하나의 선거마당으로 등장하였다. 지금까지는 후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일방적인 플레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선거마당에 활용되면서 상호작용이 가능해졌다. 후보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바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국민들은 즉석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각 사이트들의 자유게시판과 의견난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열기에 쓰러지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힘을 얻는 후보도 있었다. 이는 이번 대선결과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올 것이 틀림없다.

셋째, 우리도 영향력 있는 좌경성향의 후보를 가지게 되었다. 결과 과거 우경일색이던 시절, 맨 날 그 나물에 그 밥이던 정책들에 비해 확연히 대별되는 정책과 문제해결 방식들을 볼 수 있었다.

국민들은 즐거웠다. 해결 방식에 있어서 근소한 차이를 보이는 2강 후보들의 말끝마다 나서서 ‘떼쟁이가 되더라도 할 건 해야겠다!’며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고 덤비는 후보가 하나 있어 얼마나 생동감 있고 재미난 TV합동토론회가 되었던가 말이다. 확실하게 견제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는 후보를 가졌다는 건 새로운 세기의 우리 정치가 그만큼 균형감각을 갖춘 경쟁력 있는 새 정치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전환기

마지막으로 이번 대선은 과거 유래가 없을 정도로 세대간의 대결 양상이 뚜렷하다. 한 여론 분석 결과에 나타난 대미관계 세대간의 입장을 보면 81.3%가 이번 여학생 사건을 계기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개정해야 한다고 응답하였고 15.3%가 대미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조용히 대화로 풀자고 응답했다.

SOFA 개정에 적극적 의지를 표명한 응답자들의 대부분이 20,30대이고 반면에 조용히 대화로 풀자는 견해는 60세 이상에서 나왔다.

어떤가. 우린 분명 한 전환점에 와 있다. 이젠 정말 우리가 나설 차례다. SOFA를 이대로 둘 것인가, 말 것인가. 이 하나의 문제를 놓고 대별되는 아버지들과 아이들 세대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저변이 충돌하고 있는 것을 응시해보자. 세대간 의식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며 절대 문제 상황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힘은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터운 지층을 뚫고 솟아오르는 생명수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저 이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뿐이다. 정치세력은 그들 대로 놓아두자. 그들에겐 자생력이 없다. 그들을 긴장시키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12월 19일, 우리는 그 결정을 할 수 있다.

양은주 정치평론가

입력시간 2002/12/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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