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읽기] 또 다른 축제를 기다리며…

돌이켜 보건대 2002년을 기념할 수 있는 말은 축제(祝祭)가 아닐까 한다. 6월의 붉은 물결은 한민족이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참여한 최초의 문화적 축제였고,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신구세대가 어우러져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장래를 논의한 정치적 축제였다.

만약 축제를 페스티벌이나 카니발로만 이해하지 않고 축제에 내포된 제의(祭儀)의 측면에 주목한다면, 촛불시위 역시 효순 양과 미선 양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축제란 반드시 웃고 떠드는 양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신성한 가치에 대한 의식(儀式)이 치러지는 시간과 장소가 다름 아닌 축제이기 때문이다.

여러 축제를 통해서 우리가 새롭게 되찾은 것은 광장(廣場)이었다. 2002년의 광장이 갖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시민사회적인 시공간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인터넷과 미디어 테크놀러지(전광판·휴대폰 등)를 전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창출해 낸 시공간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2002년 한국의 축제는 시민적인 열정과 미디어 테크놀러지의 행복한 만남이 거리로 뛰쳐나와 일상을 바꾸어 놓은 양상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축제란 무엇인가. 장 뒤비뇨의 축제와 문명에 의하면, 축제는 일상생활의 단절이다. 따라서 축제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개입하게 마련이다. 규범적인 일상에서는 용인되지 않던 온갖 외설스러운 말들과 무례한 행동들이 축제의 과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용납된다.

사람들은 괴상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과격한 행위와 거친 행동을 거침없이 하며,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아있어야 할 사실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사물들이 형성하고 있는 관습적인 질서를 바꾸어 놓는다.

6월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의 붉은 티셔츠와 페이스 페인팅(face painting)이란 축제에 참여하는 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가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엄숙하기만 했던 광화문이라는 공간의 질서와 의미를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축제는 일상의 정지이며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리고 축제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일종의 근원적인 혼돈을 야기한다. 축제에 사용되는 가면들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가 맺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 이 지점에서 축제가 갖는 또다른 측면이 부각된다.

축제는 기존의 규칙과 규범을 위반하고 파괴하는 움직임인 동시에,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축제의 고양된 감정이란 사회의 지배적인 표상과 규칙들의 파괴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파괴의 즐거움이 아니라, 사물이나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기회나 가능성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경험이다.

축제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가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탈문화의 세계, 달리 말하면 규범과 질서가 부재하는 공포의 공간을 예감하게 한다.

이 지점에서 축제의 참가자들은 축제 기간 동안에 경험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가슴에 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2002년 한국민이 만들어낸 축제는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하지만 축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일상으로 되돌아와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광화문과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촛불시위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축제는 이제 끝이 났다. 정치적 축제가 끝난 시점에서 승자와 패자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는 전쟁이 아니라 축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당선자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사람들을 반대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노무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또다른 가치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말아먹은 부패한 정권에 대한 심판이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일반시민들이 결코 보수나 수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에게 대화와 포용의 정치를 간절한 심정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정치 권력자 특유의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엄정한 거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를 고대한다. 축제의 흥분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늘 그랬지만 이번 글은 특히 많이 흔들린다. 하지만 선거 다음날에 씌어지는 이 글도 축제에 대한 작은 기록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제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작은 희망 하나를 가슴속에 품어 본다.

입력시간 2002/12/2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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