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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회창, 정치입문 6년만에 '아름다운 퇴장'

이회창은 울었다.

5년 전 15대 대선에서 패배할 때도, 야당 총재로서 온갖 모함성 비난을 집중적으로 받을 때에도 늘 대꼬챙이처럼 꼿꼿이 서 있던 그였다. 그런 그가 12월20일 대선패배 이후 한나라당 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한번에 쏟아냈다.

“6년전 정치에 들어올 당시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 어찌 없겠습니까만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라며 시작한 정계은퇴 발표도중 “동지 여러분을 생각하면 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지난 5년간 숱한 고생을 같이 해오면서…”라는 대목에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고를 읽어 내려갔지만 곧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록 정치를 떠나지만 언제 어디에 있든 국민과 늘 함께 하겠습니다. 동지 여러분은 뭉쳐서 국민이 간절히 원하는 희망의 새 길을 찾아내 주기 바랍니다. 진정 건전하고 합리적인 개혁의 길을 간다면 언젠가 여러분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라고 당부하면서 또 한번 눈물을 훔쳤다.

이를 지켜보던 서청원 대표 등 당직자 100여명도 손수건을 꺼내 드는 등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이 전 총재는 이를 깨물며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고, 사람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드는 게 평생의 꿈이었으며, 진정한 개혁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본인이) 부덕하고 불민한 탓에 오늘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며, 여러분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라는 말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낙루(落淚)에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과 절반의 지지를 보낸 국민에 대한 고마움, 분신처럼 뛰어준 당원들에 대한 미안함 등이 뒤섞여 있다. 숙연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대권을 눈앞에 둔 거물 정치인에서 고희(古稀)를 앞둔 평범한 노(老)시민으로 돌아가면서 흘린 눈물이기 때문이다.


충청민심 외면이 치명타

이 전 총재가 6년여의 정치실험을 마감하기까지에는 선영이 있는 충청 지역의 민심이 철저히 등을 돌린 데에서 비롯됐다. 1997년 대선에서는 DJP연합으로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번에도 충청도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노 후보를 선택했다.

이 전 총재의 선친이 선거를 한달여 앞두고 작고해 충남 예산으로 안장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민심은 여전히 “우리는 남이다”였다. 여기에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이 전 총재 박대에 앞장선 것도 주 요인이다. 게다가 PK지역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이지 못하고 일부 누수현상이 나타난 점도 지역선거의 패인 중 하나다.

호남의 저조한 득표율과 수도권의 약보합세 등은 예견됐던 터라 대세에 별 영향을 미치진 못했고 강원과 제주 지역은 예상치에 근접했다. 역시 충청이 그를 버린 점과 PK지역의 뜨뜻미지근한 지지가 원인이 됐다.

정치적으로는 4명의 인사가 이 전 총재의 발목을 잡아 당겼다. IJ와 MJ(이인제 자민련 총재대행과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인 두 ‘J’는 충청과 PK에서 각기 분전하며 이 전 총재 표를 잠식했다. 물론 MJ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충청과 울산지역 표 이탈에는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IJ는 지난 선거에서 이 전 총재의 텃밭을 뒤흔들며 DJ 승리에 기여했고, MJ는 지지율 19%로 3위에 처져있던 노 후보와 단일화 협상을 성사시켜 노 후보 지지율을 단숨에 45%까지 끌어올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더구나 양당이 손잡고 유세활동을 편 점 등은 젊은 층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막판의 지지철회도 오히려 노 후보 지지표 결속 효과를 가져와 결과적으로는 노 후보의 당선을 도운 게 됐다. 여기에 또 다른 두명의 ‘J’도 이 전 총재에게는 철저히 등을 돌렸다. 사실상 두번의 패배를 안겨준 DJ와 두번 모두 딴지를 건 JP가 그들이다.


정치실험 접고 ‘변호사’이회창으로

이 전 총재가 정ㆍ관계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93년 3월. 소수 의견을 자주 내 개혁 성향의 대법관으로도 불렸고 판사시절 남긴 각종 판결문은 법학도에게 학습서처럼 인용될 정도였다. 그런 법조인 이회창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감사원장으로 스카우트했고 이 때부터 특유의 ‘대쪽’ 이미지를 앞세워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성역을 타파하며 칼날 같은 감사행정을 폈고 국무총리에 올라서서는 이전의 ‘대독총리’가 아닌 내각을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총리 역할을 자임하며 YS의 눈밖에 나기도 했다.

대통령에 맞서는 ‘소신 총리’로 국민적 인기를 받았던 그는 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선대위 의장으로 본격적으로 정계에 들어왔다.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YS의 경고에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보스정치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정계입문 1년여만에 여당 대표와 대선 후보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두 아들 병역문제 등으로 혹독한 ‘정치적 검증’을 받으면서 타격을 입었고, 이인제 의원의 탈당과 비주류의 흔들리기에 시달리다 대선에서 첫 패배를 당했다. 이후 98년 8월 한나라당 총재로 전면에 복귀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 등 당내 계파 수장과 중진들을 과감히 물갈이하며 정치개혁을 선도해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풍(北風)’ ‘세풍(稅風)’, ‘총풍(銃風)’ 등으로 정치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정공법으로 위기를 벗어나며 대권등극의 입지를 넓혀갔다. 이어 총선과 연이은 재ㆍ보선 및 지방선거 승리를 계기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자리잡으며 ‘이회창 대세론’을 공고히 해갔다.

호사다마일까. 병역비리 의혹에 이어 호화빌라 문제, 손녀 원정출산 의혹, 부인 한인옥씨의 ‘하늘이 두쪽…’ 등의 설화(舌禍)가 잇따라 터지면서 지지도가 하락했다. 여기에다 노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단일화로 불어닥친 단풍(單風)과 세대교체라는 국민적 파고를 넘지 못해 결국 두번째 분루를 삼켜야 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 전 총재가 다시 복귀하기는 어렵다. 두번이나 대권도전에 실패한 데다 ‘3김’처럼 두터운 지역기반도 없다. 세번째 대권을 꿈꾸기에는 나이(67)도 문제거니와 더 이상 당내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

비례대표 의원직도 내놓은 상태에서 이 전 총재에게 남는 것은 변호사 자격뿐이다. 물론 그가 일반 변호사처럼 활동하지는 않겠지만 기자회견에서 “국민과 함께 하는…”이라고 밝힌 대로 중산층 이하 서민들을 위한 변호활동으로 제3의 인생을 시작할 가능성은 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뛸 수 있도록 붙잡아달라”는 그의 간절한 기도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혁적 대법관과 소신 있는 감사원장, 대쪽같은 국무총리를 거쳐 대권에 가장 근접했던 그였다. 하지만 두번의 패배로 인해 그에 대한 기억은 귀족 이미지에 특권 보수층의 대변자가 지역바람을 등에 업고 벌인 무리한 대권 모험으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차피 그는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선거기간중 노 당선자가 주장했던 낡은 정치가 아니라 안정 속의 개혁을 주창하던 대쪽 판사의 정치 실험이었다고 기억해 두자. 대선 패배의 ?湛?지고 깨끗이 돌아서는 뒷모습에 위로와 격려를 담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노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절반의 승리를 얻어냈던 정치인이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입력시간 2002/12/2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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