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불루벨즈(上)

음악과 인생을 즐긴 멋쟁이 네 남자

불루벨즈는 1958년 3월 작곡가 손석우가 빚어낸 최초의 남성 보컬 그룹이다. 당시 미국 등 외국에선 보컬 그룹이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손석우는 자신의 문하생이던 KBS전속 신인 서양훈, 서울 음대생 현양(본명 정운화), 무역회사원 김천악, 신인가수 박일호 등 갓 대학을 졸업한 4명으로 팀을 구성, 자신이 운영했던 비너스 레코드사에 전속시키며 한국의 에임스 브라더스를 꿈꿨다.

블루벨즈 이전에도 이난영이 주축이 됐던 <저고리 시스터즈>, 장세정, 신카나리아, 황금심 등 유명 여가수들이 모여 즉흥적으로 노래를 몇 번 불렀던 <아리랑 시스터즈>가 있긴 했지만 온전한 의미의 보컬 그룹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한국 최초의 보컬 그룹 <김시스터즈>가 대중 앞에 선 것은 1953년 가을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에서였다. 하지만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이처럼 여성 보컬 팀들은 간간이 선보였지만 남성 보컬 그룹은 불루벨즈가 처음이었다.

주위에서는 “사람 웃기는 짓” “도대체 남자들로 보컬 팀이 될 수 있을까?” “멀쩡한 사내 넷이 유행가를 합창하다니 말도 안돼”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주위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35년생 네 사람은 손석우의 의견에 따라 팀 결성을 감행했다. 손석우는 새로운 음악세계를 펼치라며 ‘푸른 종’이란 의미의 불루벨즈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불루벨즈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1958년 11월께. KBS라디오 드라마 <시계 없는 대합실>의 주제가를 부르면서부터다. 이때 서양훈이 바리톤, 현양 베이스, 김천악 하이테너, 박일호 멜로디의 화음으로 첫 취입했다. 이들의 노래가 방송을 타자 대중은 “사내들이 군가나 명곡을 불러야지 어떻게 합창으로 유행가를 부르느냐”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당시는 TV가 없던 시절이라 불루벨즈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려면 극장 쇼 무대에 서야 했다.

“남자들이 여럿 함께 쇼 무대에 서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쇼 무대는 따로따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1960년 3월에 처음으로 국도극장 쇼 무대에 섰는데, 외국 남성 보컬 팀처럼 검정 턱시도를 입었습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최희준, 위키리, 권혜경, 송민도, 박재란 등 당시 인기절정의 가수들로 꾸며진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은 눈앞에 벌어진 진풍경에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곧 멋들어진 남성 화음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이국적인 맛을 풍기는 멋쟁이들”이란 찬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장안의 화제로 떠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남성들은 최희준과 위키 리를, 여성들은 이국적인 용모를 지닌 유주용을 좋아했다. 불루벨즈가 이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1960년 11월. 손시향의 히트곡 <검은 장갑>을 리바이벌해서 부르자 여성 팬들은 불루벨즈에게 몰려들었다. 여성 팬들 사이에 “넷중에서 누가 제일 좋다”는 식의 ‘선택 퀴즈’ 신드롬이 일어난 것도 이때쯤이다.

당시 불루벨즈의 공연장을 찾은 여성 팬들은 대부분 교육 수준도 높고 순수했다. 용기 있는 몇몇 여성들이 무대 뒤로 와 사인을 받아갔지만 대부분은 수줍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멤버 중 한 명과 악수라도 한번 나눈 여성은 ‘큰 사건’으로 여기며 감격해 했다.

불루벨즈는 여성팬들로부터 당시 유행하던 나무 마스코트도 수없이 받았다. 지방공연을 가면 그 지방 아가씨들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와 멤버들에게 숙소를 잡아주고(물론 숙박비도 지불했다)는 말없이 도망쳤다. 떠나는 날엔 일찍 숙소로 찾아와 기차역까지 동행하면서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눈물겹게 손수건을 흔들기도 했다. 순박했던 이 시절의 낭만이 배어 나오는 풍경들이었다.

멤버 중 김천악은 특별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962년 봄 경복궁에서 열린 제1회 산업 박람회장에 쇼 무대가 마련되었다. 공연을 마친 그에게 한 여성팬이 꽃다발을 들고 무대 뒤로 찾아왔다. 감격한 김천악은 이후 2년 간의 연애 끝에 그 여성 팬과 결혼을 했다.

불루벨즈 멤버들은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 당시 출연료는 특급 가수급인 1,500원. 그걸 넷으로 나누면 C급 가수의 출연료 수준이 되었다. 이들은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보다는 명동ㆍ무교동의 뒷골목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며 음악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즐거운 잔칫날’ ‘열 두 냥 짜리 인생’ ‘이거 되겠습니까’ ‘미워도 한 세상’ 등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지만 그룹이라고 돈을 더 주는 법이 없어 늘 어렵게 활동을 해야 했다.

1956년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10인치 LP음반시대에 독집 음반을 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1960년께부터 시작된 12인치 LP음반시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루벨즈에겐 독집 음반 발표의 기회가 찾아왔다. 1963년이었다. 그간의 히트 곡들을 모은 <불루우 벨즈의 걸작집.비너스레코드.VL201>은 최정상의 인기를 증명해주는 첫 독집 음반이었다.

입력시간 2002/12/3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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