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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의 세계] 위로받는 영혼을 위해 글을 쓴다

[방송작가의 세계] 위로받는 영혼을 위해 글을 쓴다

글보다는 감수성이 필요한 작업

글을 통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보다, 화려한 영상으로, 때로는 콧날을 시큰하게 하는 대사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직업이 있다. 아침상을 물려야 하는 주부들을 TV 앞에 불러 앉히고, 퇴근시간을 재촉하여 일찌감치 사람들을 집으로 향하게 하는 힘. 이러한 힘을 만드는 이가 바로 영상 시나리오 작가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눈

글의 기본은 인간학. 이는 시나리오의 경우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특히 TV드라마는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매체의 특성을 갖고 있기에 정서적으로 이롭고 유익한 내용을 그려내야 한다.

하지만 많은 부분 정서에 해악을 끼치는 드라마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최현경(42세ㆍ드라마작가)씨는 “드라마작가는 특정 층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지기 보다, 많은 시청자가 즐겁게 보고,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고 말했다.

드라마는 제작시, 작가와 연출자를 먼저 정하는 것이 차례다. 작가와 연출자가 정해지면 서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조율해, 그 소재에 맞는 대본을 집필한다. 이 때 작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남다른 감수성.

이런 예민한 감수성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게 최현경 작가의 말이다. “작가로서의 자질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다면 균형감각을 잃어 아집에 빠지기 쉽죠. 특히 드라마작가는 글재주 보다 남다른 감수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봐요.” 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보였다.


기다림과의 싸움

영화를 통한 시나리오 집필도 이러한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작가의 세계는 상업성과 흥행이라는 현실과 부딪혀 빛을 잃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4년이 넘는 오랜 습작기간을 거쳐 지난해 영화 ‘아프리카’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성실(30세ㆍ영화시나리오작가)씨. “당선이 되고도 비 상업적인 소재라는 이유로 투자자를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 다행히 투자자를 찾았는데, 계약에서 제작 마감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렸죠. 그러니까, 이 작품은 집필 기간부터 따지면 3년 이상이 소요된 작품 이예요.”

덧붙여, 이런 지루한 기다림과 쉽게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의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거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곳곳에선 시나리오 교육기관이나 이와 비슷한 문화센터가 늘어나고 있다.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방송작가의 세계는 그야말로 살벌한 전쟁터예요. 대충, 적당히, 이런 말은 절대 통하지 않아요. 섣불리 덤벼 들었다간,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존심마저 상처받고, 살아남으려고 버둥대다 보면 비굴해지기 십상이에요.” 지망생들을 향해 조심스레 남기는 김성실 작가의 조언이다.


하지만, 걸어보지 못한 길

여러 교육원의 공통점은,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자라는 점. 새내기 대학생부터 자녀를 출가시킨 주부까지 그 연령층 또한 다양하다. 도대체, 시나리오 작가의 어떠한 매력이 여성들을 이 자리로 끌어 놓는 것일까.

작가지망생 김지현(25ㆍ학생)씨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공감하도록 누군가의 입과 영상을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형식이 매력적이지 않냐”고 되물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그 속에 살아보는 것은 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표현하고, 그런 나로 인해 남들을 울게도 웃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분명, 말로만 들어도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지 않냐고 묻자, “가보지 못했으니 가는 거죠. 포기하는 이유를 알 때까지 도전하라는 게 선배 작가님들의 조언이에요”(강소희ㆍ 31세ㆍ직장인)


생활에서 돌아보기

우리의 모든 일상사가 드라마에선 가장 재미있는 소재. 책이나 영화, TV, 신문을 통해 듣는 시의성은 그 다음이다.

심지어 꿈을 꾼 장면을 그대로 영화 속에 옮겨 넣는다는 김성실 작가는 “전, 특이하게도 침대 위에서 많은 것을 얻어요. 잠자기 전, 불면의 시간과 숙면 대신 얻는 불면증이 주는 선물인 셈이죠.” 이렇듯 작가의 모든 하루는 아이디어와 소재와의 싸움. 그러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현장 답사를 해야 하는 부지런함도 필요하다.

“재판과정은 물론, 필요하면 형무소 안의 죄수까지도 만나야 하죠.” 하지만 이런 생생한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현실과 드라마 속의 현실이 다른 경우가 많아 씁쓸하다는 최현경 작가는 어린 시절 당한 성폭력의 상처를 끝끝내 벗어날 수 없어 결국 그 남자를 죽인 김부남씨의 선고공판을 취재한 당시를 얘기하며 작가로서 다시 한 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진지함을 요구했다.

“처음으로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에 작가로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에요. 더 많이 생각하고 우리 각자가 많이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사회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이 화면 속에 담겨 전해질 때의 행복 보다, 조카와 노는 시간이 더 복하다는 그녀, 앞으로도 지금처럼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단다.(김성실 작가) 가족에 대한 소홀함을 드라마 속 인물로 옮겨 놓아,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그녀, 힘들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가며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최현경 작가)

글쓰기로 충혈 된 눈빛을 감추며 웃는 그들의 웃음 속에서, 힘들지만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전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매력적인 일"- 최현경 작가

“드라마를 왜 쓰냐고? 드라마가 좋으니까, 누군가 내 드라마를 보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게 좋으니까. 어느 장소에서 작가가 바로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내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기분. 내 드라마에 위로 받아 행복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스스로에 대한 위안. 그 기분을 잊지 못하니까. 또, 왜 쓰냐고? 그래도 드라마가 좋으니까…”

(1989년11월 17일 KBS드라마 미로일기를 데뷔. 야망의 불꽃(SBS), 우리가 남인가요(KBS) 외 다 수의 단막극 및 일일극 집필)


"집을 짓는 마음으로…"- 김성실 작가

“시나리오 작가란, 말 그대로 집을 짓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매번 기초 공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힘든 일이지요. 예전에 홍세화씨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특권층이다’ 라고 특권층에 관해 정의한 글이 생각이 나네요. 그렇게 보면 시나리오 작가는 대부분 특권층인 셈이에요. 시나리오 작가 모두가 이 일에 만족하거든요.”

(영화 '아프리카' 각색 및 2000년 시나리오뱅크 공모전 당선. 개봉 예정작 ‘플리스틱 트리’ 집필 등 현재 배제대학교 공연영상학부 ‘시나리오구성’ 강의)

황경란 자유기고가 seasky72@korea.com

입력시간 2002/12/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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